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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백 Jun 13. 2024

드디어 내 편이 생겼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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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다. 예전에는 "그거 봤어?"할 만한 마케팅이 지하철 광고를 통해서 등장했는데 요즘 지하철을 타면 얼굴도 모르는 아이돌 가수의 생일을 확인하거나 공무원 입시준비를 요즘도 사람들이 열심히 하나? 라는 시시껄렁한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하철 공사의 적자를 줄여주는 고마운 광고주가 있었으니.. 바로 결혼정보회사 듀O!


결혼적령기의 작장인들을 타겟으로 했을, 지하철 내부를 도배한 듀O의 광고를 보다 보니 인상적인 카피가 있었다. 전문직 회원수 0000 명!


내가 결혼 어시장의 활어로 올려져 있던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결혼 상대를 물색하는 남녀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회사를 다니는지에 대한 것이다. 앞으로 함께 꾸려 갈 결혼생활에서 경제력은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큰엄마는 내가 회사에서 만난, 참 마음이 좋은 어른이다. 그 분이 소개해 준 남편. 스펙의 무게로 따지자면 우리는 마치 기울어진 시소 같았다. 남편은 변변찮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나는 꽤 변변한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돈에 대한 관심이 적고 진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는 남편의 앞날은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어도 핑크색으로 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소개받는 자리에 나간 이유는 자포자기한 심정 때문이었다. '혹시나'해서 나간 소개팅 자리가 '역시나'로 좌절된 경험을 수십차례 한 뒤였고, 마음 한 켠에는 조건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는 순진한 생각도 남아 있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애는 우리 엄마가 봐 주시기로 했다'라는 엄청난 발언을 듣기도 했고, 얜가? 쟨가? 하며 간만 보는 소개팅남들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나의 콤플렉스를 계속 자극했다. 스물 아홉살의 11월. 나는 매우 지쳐 있었다. 단 한 사람, 내 편을 찾는 여정에 이만 종지부를 찍고 싶은데 , 영원히 못 찾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도 밀려 왔다.


남편의 첫 인상은 수줍게 웃는 모습이 참 예쁜 사람. 첫 만남과는 다르게 스스럼없이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 어떤 꿍꿍이도 발견할 수 없는 사람. 무엇보다 나를 거슬리게 하는 점이 없는 사람. 연애할 때는 그저 행복하고 그저 좋았다.


자연스럽게 이 사람과의 결혼을 생각했다. 하지만 이 결혼은 나로서는 오랜 시간 감내해야 할 무엇이 생기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까지의 내 인생의 궤적은 평균 이상을 향한 것이었다. 중상위권의 대학 졸업장, 그럭저럭 부러움을 살만한 직장. 남편과 결혼하면 나는 내가 그어놓은 평균이라는 선에서 한참 못 미치는 지점으로 낙하할 것이다. 두려웠다. 너무너무 두려웠다.


그래도 이 사람의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곁을 찾았다. 남자친구를 사랑하는 만큼 나도 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연애할 때는 한 번도 다투지 않았지만 함께 산 지 십여 년. 우리는 수도 없이 싸웠다. 남편과 결혼하며 내게 지워진 삶의 무게와 끝도 없이 빠져드는 비교의 늪 때문에 참 오랫동안 앓았다.


내가 열심히 이어온 평균 이상의 점들은 나에게는 삶의 업적이었다. 입 밖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나의 희생을 알아주길 바랐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 제일 알아줘야 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 알아주지 않아 서운하고 참 비참했다. 남편을 만나고 그렇게 마음이 편안했었는데 나는 또다시 어렸을 때처럼 '계속 화가 나 있는 상태'로 돌아갔다. 치사해서 생색을 내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도 안 알아주니 자연스럽게 생색을 내게 되었다. 온몸으로 부정적인 기운을 발산하면서.


이직을 반복하던 남편의 회사 집에서 점점 더 멀어졌다. 남편은 장거리 출퇴근에 지쳐 집에 오면 쉬고 싶어했고 자연스럽게 집안일은 내가 도맡아 하게 되었다. 더 벌어 오는데도 더 집안일을 많이 하는 이 부당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미안해서라도 알아서 해야 하는 거 아냐?'


아이가 태어나고부터는 독박육아까지 얹어졌다. 개미만했던 나의 피해의식이 어느새 집채만큼 몸집을 불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피해의식에 잡혀먹힐 것 같았다. 아이가 생기니 불안감은 더 커졌다. 이 좁아터진 낡은 아파트를 아이의 물건들로 꽉꽉 채우며 평생 대출금을 갚다 인생 쫑나겠다. 내가 그토록 바랐던, 평균보다 조금 더 여유로운 삶은 내 인생에 없겠구나.


꽁꽁 숨겨왔던 속내를 남편한테 홧김에 질러 버린 어느 해 생일, 나는 혼자 동네 개천 앞에 쭈구리고 앉아 길을 잃은 아이처럼 울었다. 내 인생의 디폴트값을 매번 힘듦으로 설정하는 내가 너무 미워서, 남편의 마음에 생채기를 낸 나의 못남을 저주하며, 그럼에도 나를 이렇게 서운하게 만든 사람들을 원망하면서.


빠져 죽을 수도 없는 저 알량한 개천물의 깊이가 내 도량의 깊이인 것 같아 엉엉 울며 개천물을 노려보았던 그 밤을 생생히 기억한다.


동네 개천. 평상시에는 산책로, 때론 대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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