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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백 May 31. 2024

이제부터 좋은 기억으로 채워볼까요

아픈 기억 대신 좋은 기억을 긴급 수혈해 보자!


취업을 했다. 매월 25일 회사에서 나에게 돈을 준다. 들어오기 무섭게 사라져 버렸던 아르바이트 비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동안 나를 그림자 취급했던 행복이란 친구가 드디어 나에게도 알은체를 해 주는 것인가.


첫 발령지는 지방 소도시였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발령지를 보기 전에는 그런 동네가 있는지도 몰랐다. 월요일 새벽에 서울집을 떠나 고속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출근을 했다. 평일에는 사택에서 생활하다 금요일 오후 6시, 퇴근시간이 되면 부리나케 서울로 향했다. 퇴근 무렵에는 차가 막혀 6시에 출발하면 10시 도착, 8시에 출발하면 10시 반쯤 도착했는데 그래도 6시에 출발했다. 그렇게 한시도 붙어 있기 싫었던 집에 이렇게 가고 싶어 지다니. 회사는 월급 말고도 웃픈 선물을 주었다.


주말에는 지난 5일을 설욕하고자 밀도 있게 스케줄러를 채웠다. 1분 1초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고 주말을 빽빽하게 채우던 나의 노력은 이제 보니 처연하기까지 하다.

토요일 아침 8시에 집을 나서서 전철역 인근 카페에서 모닝세트를 주문해 하루를 시작한다. 책도 보고 멍도 때리면서 약속이 있으면 약속시간을 기다리고 약속이 없으면 동네 친구가 나오길 기다린다. 1일 1 영화는 필수다. 한 달에 한 번은 LG아트센터나 샤롯데 같은 극장에 가서 뮤지컬을 보고 소극장 공연은 또 따로 챙겨서 봤다. 점심은 이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곳에서. 저녁은 동네 술친구와 한잔 두 잔 기울인다. 술도 깰 겸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히히, 우리 내일도 또 봅시다~~


그때 나는 즐거움을 강박적으로 수집하는 사람 같았다. 맛있는 음식에 집착했고 예쁜 옷을 보면 눈이 돌아갔다. 그동안의 내 인생에서 숭덩 빠져 있었던 것들을 채우려는 듯 기분 좋아지는 것들, 소소하게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찾아다녔다.


아무도 읽지 않을 것 같은 책들을 잔뜩 사 오면서 느꼈던 만족감(나 역시 읽지 않았지만), 큼직한 올리브가 알알이 박혀있는 치아바타를 발사믹 오일에 찍먹할 때의 풍미. TV광고에서 봤던 화장품을 백화점에서 내 카드로 사면서 느꼈던 우쭐함. 이런 것들이 나를 행복이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줄 것 같았다.


허영도 아니고 사치도 아니고 가식도 아니다. 조건 없이 나에게 좋은 것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와서 아이들을 낳고 키워보니 알겠다. 마음을 주면서 가성비를 따지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나에게는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존재가 없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나의 과거는 좋은 기억들 대신, 너무 쓰라려서 잊고 싶은 기억들로 가득했다.



고등학교는 쇼생크 감옥 같았다. 아침 7시 20분부터 밤 9시까지 학교 담장 안에 갇혀 있었다. 콩나물시루같은 교실 안에서 기간제 선생님한테 이상한 농지거리나 하는 애들과 함께 있으려니 정말 고역이었다. 선생님들도 좀 이상했다. 같이 갇혀 있어서 그랬던 걸까? 신경질적이고 화를 참지 못했다. 복도에서 별다른 이유 없이 맞는 학생들을 심심찮게 보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물에 젖어들 때쯤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시절이 너무 즐거웠다고 회상했다. 나는 속으로 이 친구 정신이 좀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세상 모든 것에 화가 화르르 올라오던 시절, 내 눈에는 선생님들의 비틀린 성정과 아이들의 유아틱한 잔인함만 보였다. 내 인생에 기본값은 힘듦이기에 다른 이들보다 힘듦 하나만큼은 잘 견딜 것이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나는 힘듦을 잘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 힘듦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부정적인 면만 극대화시키는 프로 불편러, 그게 나였다.



주말의 시간이 '달콤한 나의 도시'였다면, 평일은 오피스 잔혹사 그 자체였다. 시골 사람들은 다 전원일기에 나오는 일용아저씨처럼 순박한 줄 알았는데 그거야말로 순박한 생각이었다. 평상시에는 허허거리다가도 이해관계가 얽히면 세상 이기적으로 돌변하는 열 살, 스무 살 위의 선배님들 덕에 마상을 많이 입었다.

부딪히고 깨지면서 깨달았다. 강철냄비인 줄 알았던 나의 영혼은 유리잔에 불과했다는 것을. 재질도 허약했고 그릇도 작았다. 어느 날은 직원 휴게실에서 아이처럼 엉엉 목놓아 울었다. 이유는.. 회사 개저씨가 지가 사고는 다 치고 나한테 다 떠넘기고 욕은 나 혼자 먹고 흐엉엉...


결국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는 '진짜 나 자신'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크한 척 뚱했던 내가 이기심을 내비치는 사람들의 얄팍함에 계속 상처를 받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열심히 주말은 하루하루를 알차게 채워 나갔다.


그런데 굉장히 의아한 점이 있었다. 일상의 반짝임을 수집한다며 부산을 떨면서도 컴퓨터 프로그램이 자꾸 오류가 나거나 처리하기 싫은 일이 생기거나 하면 왈칵 사라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 죽고 싶네?'

막연하지만 선명했던 순간의 그 생각, 그 감정.


31살 때 제대로 격랑을 맞았다. 꽤 오랜 기간 받은 스트레스와 격무로 몸과 마음이 다 너덜너덜해졌다. 지인의 소개를 받아 심리상담센터의 문을 열었다. 10회에 걸친 심리상담 동안, 상담자와 대단한 소통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 이야기를 울고 불면서 두서없이 얘기했을 뿐.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늘어놓았던 신세한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단 한 가지, 이제껏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이야기를 했다. 막연해서 긴가민가 했던. 그러나 분명히 존재했던 그 느낌에 대하여.


"저는 즐거움을 적극적으로 찾고 누리고 사는 사람인데, 오늘 죽는다 해도 하나도 아쉽지가 않아요."

..............................

"당연한 것 아닌가요? 영백 씨는 살면서 좋았던 적이 없잖아요."


아... 맞아. 그랬지. 나는 좋았던 기억이 없었어. 그래서 닥치는 대로 좋은 기억을 만들려고 했구나.

작은 일에도 쉬 무너져 울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정말 열심히 나를 세워 올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저, 살기 위해서.


육아하면서 쉬었던 나만의 즐거움 찾기, 다시 도전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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