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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백 May 22. 2024

고백합니다. 나는 내가 정말 싫었거든요.

애쓴다며 나를 다독일 수 없었던 이유

나부터가 나한테 다정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나는 스스로에게 "너 잘하고 있다, 참 애쓰고 있다."며 다독여줄 수 없었다.

나 자신에 대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은 양가적이었다.

'참 매일을 허덕이면서 산다'란 신세한탄에 가까운 연민과 함께

'할 수 있음에도, 해야만 하는데도 하지 않는 사람'이란 차가운 평가.


빛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 속에 있다. '언젠가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고 있다. 저 먼 곳에서 희미하게 빛이 보인다. 더욱 힘을 끌어올려야 하는 순간에 나는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라는 듯이.



어릴 때부터 나에 대해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하고자 하면 뭐든 다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이 힘듦도 잘 견뎌내고 있다고. 학교도 다니고 시험도 보면서 안 죽고 잘 살아 있다고. 스무 살이 되어 성인의 날개가 달리면 나는 미운오리새끼처럼 백조로 변신해서 이 세상을 날아다닐 거라고.


그런데 이 믿음이란 참 얄팍한 것이어서 사소한 바람결에도 맥아리 없이 꺾여 나갔다.


고 3 1학기. 11년 동안 교실 한편을 지켰던 노력들이 빛을 발해서인지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능을 백일 남겨놓고 나는 거짓말처럼 공부를 손에서 놓았다. 그때도, 그 이후에도 내가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대학 다닐 때의 꿈은 방송국 PD였다. 동아리 선배가 공중파 PD가 되자 너무 멋있고 좋아 보였다. 반전은 나는 방송국 입사시험에 단 한 번도 원서를 내지 않았다는 것. 방송국 채용 공고가 올라오는 시즌이 되면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그토록 바랐던 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았기에 내가 너무 싫고 미웠다.


학교 친구들은 되든 안되든 관심이 있든 없든 대기업 채용 공고가 나오는 족족 원서를 냈다. 나는 내가 조금이라도 입사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회사에는 절대 원서를 내지 않았다. 어설프게 좋은, 관심은 일도 없는 회사 한 두 군데에 지원을 했다. 떨어지더라도 "나 사실 이 회사에 별로 입사하고 싶지 않았어. 거기 좀 별로 아냐?"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곳에 원서를 내고 서류전형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환멸을 느꼈다. "도대체 원하는 것이 뭐야?"

노력하지 않고 거저 주어지길 바라는 건가? 아니다. 내 인생에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마다 제자리에 얼음! 하고 멈춰 서 아무것도 하지 않 것을 선택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하면 어쩌지?  열심히만 한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 한 조각을 남겨두기 위해서, 아직 펼치지 못한 나의 능력에 대한 망상을 키우기 위해서 나는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열심히 안 해서 그래. 열심히만 하면 달라질 거야. 잠재돼 있는 가능성조차 없는 나는 정말 가치가 없는 인간일까 봐, 그걸 알아 버릴까 두려웠다.


웃기는 것은, 진짜 나를 마주하면 실망할까 두려워 도망치는 나에게 주구장창 실망했다는 것이다. 내 모습이 한심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내가 정말 너무나도 싫었다.


입사원서를 내지 얂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현실 속의 나는 어디에도 선택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 벌벌 떨었다. 나는 내 인생을 내 힘으로 개척하고 끌고 나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정작 그 바람을 현실로 만들어야 할 순간에는 어붙어 버렸다.

도 이런 내가 싫은데 나를 누가 선택하겠어? 취준생으로서 나는 자격미달이었다. 나를 좋아하지 못했기에 '나는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살다 보니 알게 됐다.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눈앞에 펼쳐질 미래에 대한 기대가 주는 즐거움. 그리고 막다른 곳에 다다랐을 때 여길 벗어나려는 절박함.


나에 대한 실망과 거절에 대한 두려움에 발목 잡혀 얼음! 이 된 상태로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다. 이번에는 엄청난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토록 이 집을 벗어나길 바랐는데 하릴없는 백수로 눈칫밥까지 얻어먹으면서 살 수는 없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소속이 없는 신분이 되자 불안감은 더 커졌다.

드디어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곳까지 왔다. 그 절박함에 나는 고3 수험생들과 독서실에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6개월 뒤, 지금 다니는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십수 년이 흘렀다. 나는 남들보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는 만년 직원이다. 애 둘 독박 워킹맘으로 하루하루 고군분투하고 있으니 허덕이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그런데 지금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절박함이 아니라 즐거움이다. 비로소 내일이 주는 기대감으로 즐겁게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되었다.   


남들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되어 보란듯이 잘 살고 싶었다. 그런 주제에 죽도록 노력하지 않는 내가 싫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던 많은 날들. 앞으로 나아가는 데는 즐거움이라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뭐든 즐겁게 하고 싶은 마음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마음이라는 엔진이 힘이 딸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음을,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죽도록 노력하지는 못했지만, 꾸역꾸역 해야할 일을 해낸 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나만의 저력임을. 지금은 안다.


이제는 다정하게 나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

"너 참 대단해. 잘 버텨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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