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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백 May 08. 2024

스무 살, 영점에 서다

나의 내적자원은 모두 소진하고 0에서 다시 시작

그토록 바라던 스무 살이 되었다. 2002년에 대학에 입학한 02학번한테는 상큼하게도 산소학번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산소학번이 되었으니 이제 나도 숨 좀 쉬고 살겠고나. 


스무 살이 되면 뭔가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막연하게 품고 살아왔다. 나를 옥죄고 있던 집과 학교의 굴레를 벗어나면 자유롭게 있을 같았다. 그런데 막상 스무 살이 되어 보니 자유는 허락된 만큼 주어지는 것이더라. 여전히 집에서 먹고 지내고, 학비를 지원받고 있으니 이제 내가 숨 좀 쉬게 내버려 두라고 말할 수 없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학비를 제외하고 내가 쓰는 모든 돈을 벌어서 썼다. 내리 3년을 평일에는 수업 듣고 과외하고 주말에는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냈다. 그리고 나는 그만큼의 자유를 획득했다.


당시에는 대중교통 환승 시스템이 없었다. 우리 집은 지하철 역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터라 부모님한테 후불 교통카드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교통비라도 달라는 얘기였다. 우리집은 차비 오만 원도 애한테 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집이 아니었다. 그러나 엄마는 아버지한테 그 말을 꺼내길 꺼렸고 아버지는 내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아, 진짜 더럽고 치사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집 가장인 아버지의 기준에서 학비를 주는 것은 가장으로서 책무였고 교통비 오만 원은 자식에 대한 마음이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오만 원짜리 마음조차 내어 줄 의향이 없었다. 엄마는 나에 대해서 '쟤는 저가 알아서 잘 산다. 저 정도면 살만한 거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한 번도 나에게 "학교 다니랴 알바하랴, 힘들지?"라고 말해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몰랐다. 스무 살은 경제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의지할 대상이 필요한 나이라는 것을. 그때 나는 나의 능력이 부족해서 아직도 이렇게 원가족에 묶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음 한편으로는 부모님이 백화점에서 사 준 브랜드 옷을 입고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시기하면서.


버스비 천 원이 아까워 과외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책을 이고 지고 캄캄한 밤 속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 내 인생의 무게는 딱 그만큼이 아니었을까. 엄마가 큰맘 먹고 사 준 빈폴 크로스백을 매고 양손에 받쳐든 책들. 처음에는 무겁지 않아도 걷다 보면 힘들어진다. 책임져야 할 사람은 오로지 나 하나. 책이 무겁다고 느껴지면 주문처럼 되뇌었다. 잘 살면 되지. 잘 살 거야.   




잘 살고 싶어서 끝없이 나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뭘 잘할까?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금방 답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쉽사리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나에 대해서 가장 내세울 수 있는 한 가지는 나는 힘든 시간을 오랫동안 견뎌온 사람이라 남들보다 힘듦을 잘 견딜 것이라는 것! 나는 어떤 어려운 상황도 잘 헤쳐 나올 수 있어. 그런데 웬걸.


영화가 너무 좋아서 들어간 영화 동아리는 방학 때마다 진짜 영화를 찍었다. 영화를 찍는 일은 당연히 쉽지 않다. 뺑끼를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사정을 대며 이미 다 도망갔고 소수가 남아 영화를 찍게 되었다. 눈발이 날리는 날씨에 야외에서 하루종일 촬영하는데 나는 정말 다 던지고 도망가고 싶었다. 이 추위에 내가 대체 왜 여기서 떨고 있는지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얌체처럼 빠진 다른 부원들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그 자리에서 우거지상을 쓰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생판 모르는 남이 찍는 영화에 출연해 얇은 옷을 걸치고 운동장을 몇 바퀴째 뛰고 있는 배우는 불평 한 번 하지 않았다. 몇 안 되는 스태프들은 눈발이 날리자 그림이 더 예쁘게 나온다며 좋아했다. 동기 한 명은 내내 웃으며 낯설었을 배우를 격려했고 분위기를 띄우려고 연신 농담을 했다. 나는 더 기분이 나빠져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뭐가 저렇게 즐거운 거야?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나에 대한 믿음이 어그러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남들보다 힘듦을 잘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 남들보다 힘듦을 못 견디는 사람이었다. 조금만 몸이 힘들거나 상황이 어려워지면 다 집어던지고 도망치고 싶었다. 시도 때도 없이 막연히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고 아무렇지 않게 '죽고 싶어'라고 혼잣말을 하곤 했다. 사라지고 싶은 충동은 곤란하거나 하기 싫은 일과 맞닥뜨렸을 때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깔깔 거리며 웃고 있는 순간에도, 즐겨 가는 밥집에서 메뉴를 고를 때도, 도서관에서 읽고 싶던 책을 빌리고 나설 때도 이 놈은 "나 여기 있는 거 잊어버린 거 아니지?"라며 고개를 내밀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르게 자리 잡은 내 코 밑의 점처럼 항상 나와 착 붙어 있는 달갑지 않은 녀석.


마지막 하나 남은 것 같았던 나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면서 가뜩이나 미웠던 나 자신에게 더욱 싫증이 났다. 자괴감이 뚫어 놓은 길고 긴 터널에서 어떻게 빠져나갈지 몰라 이불을 꼬치처럼 둘둘 말아 애벌레처럼 웅크렸다. 참 이상했다. 눈에 온실 속의 화초처럼 보였던 굴곡 없이 자란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나보다 훨씬 더 잘 이겨냈다. 그들의 밝음이 부러울수록 나는 더 작아졌다. 나만의 어려움을 호소하면 쿨한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너도 나랑 똑같아. 너도 잘할 수 있어."


"뭐가 똑같아. 하나도 같지 않아!"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피해의식까지 탑재한 모지리가 되어 버렸다.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서도 툭툭 털고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 그 어러움의 기억이 나의 발목을 잡게 두지 않고 오히려 그 시간을 빠져나온 나를 스스로 대견해하는 사람들. 찢어지게 가난해도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나를 긍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내적자원이 풍부한 사람이다.


비옥한 토양에 심어 물을 주고 햇빛을 받으면 나무가 잘 자라듯 내적자원이 풍부한 사람은 무럭무럭 성장한다. 스무 살의 나는 본래의 내 모습을 울퉁불퉁 모난 돌이라고 착각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불쑥 치밀어 오르는 내 감정들을 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호의도 달갑지 않았고 긍정의 힘을 강조하는 메시지는 다 개소리로 치부했다. 나는 참 오랫동안 스트레스를 참고 견뎌온 탓에 나의 내적자원이 0이 되었음을, 나의 밭은 짓밟히고 파헤쳐져 황무지나 다름없었음을 그때는 정말 몰랐었다.


하늘이 참 이쁜 오늘입니다. 나의 스무살을 위로해 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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