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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백 May 01. 2024

나를 미워했던 날들, 그 역사의 시작

꺼내기 싫지만, 꺼내야 하는 이야기

우리집 어린이들의 엄마라는 역할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오아시스 같은 쉼표는 찾아온다. 그럴 때면 일상으로 분주했던 머릿속을 비집고 잠들어 있던 기억이 떠올라 문득 씁쓸해진다. 오늘도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애들을 보며 멍을 때리고 있었더니 생각 조각이 퐁하고 머리를 때리고 지나간다.

나를 내보이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아이들.

우리집 애들의 나이 9살.. 7살... 그 나이 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내가 7살, 9살이었을 때의 우리집이 더 이상 '우리집'이 아님에 감사한다. 그때의 우리집은 화목한 가정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회로를 가진 사람이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 그런 유형의 사람을 나르시시스트라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우리집에서 유일하게 경제력을 가진 사람,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이었다. 그리고 그 권력을 아낌없이 남용했다. 가족 중의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가령 엄마의 밤마실이 잦다든지, 내 친구가 중딩 주제에 삐삐를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든지, 본인이 부르는 소리에 동생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든지) 구타에 가까운 체벌을 내렸고 알량한 금액의 생활비를 끊었다. 천만 다행히 악랄한 성정은 아니어서 지능적으로 사람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술담배는 일절 하지 않았고, 맨정신으로 휘두르는 폭행은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하지만 아버지의 기분은 예측불가능했고 나와 동생은 일 년 중의 한두 번 있는 그날이 오늘이 될까 봐 일 년 내내 두려움에 떨었다.


엄마는 타고난 쾌활함과 잡초 같은 생명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저런 이상한 아버지와 함께 사는 엄마가 너무 불쌍했다. 가난 속에서 자랐지만 예쁘고 똑똑하고 노래도 잘하는 우리 엄마. 그러나 어린 나는 모르고 있었다. 엄마의 힘든 인생에서 아빠와의 결혼생활이 가장 큰 불행은 아니었다는 것을. 아마도 살면서 숱한 괴로움과 상처를 견뎌냈을 엄마는 한 가지 재주를 터득했다. 그 순간의 괴로움을 가장 쉬운 방법으로 합리화해서 불행을 깃털처럼 가볍게 하는 재주. 내가 우리 아이들 나이였을 때 나의 엄마의 주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새끼들 때매 안 도망가고 산다."


엄마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쉽게 설명할 수 있던 그 주문은 나에게는 저주였다. 나는 스스로를 엄마의 인생을 묶어놓은 족쇄같이 여겼다. 나와 동생은 엄마의 괴로움을 자양분으로 엄마에게 기생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엄마의 인생에 행복이라는 양념이 되지 않으면 나는 살아갈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닐까?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오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엄마는 엄마 나름의 존재감을 피력하지 않으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위치에서 자랐다. 엄마가 신경질을 부리고 화를 내야 엄마 주변의 사람들은 엄마의 존재를 의식했을 것이다. 엄마의 생존전략은 세상에서 엄마의 눈치를 제일 많이 보는 존재 앞에서 절정을 꽃피웠다. 그 대상은 엄마의 새끼들, 나와 내 동생이었다. 엄마는 여과 없이 자신의 기분을 드러냈다. 한숨 쉬고,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다가도 너네 때문에 산다. 니들 때문에 사는 거야...


엄마 인생의 괴로움의 이유는 새끼들이었지만 엄마의 괴로움을 달래는 존재는 엄마의 술친구들이었다. 자연스럽게 엄마의 밤마실은 잦았다. 엄마는 저녁밥상을 정성껏 차려놓고 밤마다 밖으로 나돌았다. 어린 나와 동생은 어른이 없는 집에 오도카니 남겨져 있을 때가 많았다. 무서웠지만 어른이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버지집에 있으면 오늘이 공포의 그날이 될까 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어린 나는 매일을 두려움에 질려 살았다.


작은 마음에 오만가지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혹시라도 튀어나오지 않을까 자물쇠로 꼭꼭 잠가 버렸던 날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길처럼 흘려보내야 할 감정들은 그렇게 비틀리고 뒤틀려져 그대로 남았다. 괴물같이 못생긴 감정들. 표현하지 못했던, 분출되지 못했던 그 감정들은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나의 일부가 되었다. 어느새부턴가 나는 엄마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치도 보기 시작했고 날것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매일 일기를 써오게 하셨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글쓰기의 즐거움을 느꼈다. 솔직하게 열심히 썼기 때문에 아낌없이 칭찬을 받았고 나의 인정욕구는 나날이 하늘을 찔렀다. 공부가 아닌 다른 것으로 칭찬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선생님이 반 아이들 앞에서 나의 일기를 칭찬하는 날에는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혹시라도 나올까봐 두려웠던 일기 주제가 드디어 등장했다. 


'즐거운 나의 집'


나는 입술을 꼭 깨물어가며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로 노트를 가득 채웠다. 연필을 꾹꾹 눌러 적어 내려간 그때의 괴로움은 딱 한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다. 솔직히 내 마음을 쓸 수 없는 자괴감, 왜 이런 집에서 태어났을까라는 원망, 거짓말을 글이랍시고 쓰고 있는 수치심까지... 더 괴로운 순간은 며칠 뒤에 찾아왔다. 선생님은 학교를 방문한 엄마에게 나의 일기 속에 행복한 가정이 있었다는 덕담을 건넸고 엄마는 세상 자랑스러운 일이라는 듯 나에게 그 말을 전했다.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깨부수고 싶었다. 그러나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모든 것을 깨부수고 싶게 만들었던, 내 안에 비틀리고 뒤틀린 채로 섞여 있는 감정들, 그 괴물은 세상에 어느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때의 내 감정은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는 공포 위에 엄마에 대한 연민, 그리고 버리지 않음에 대한 고마움이 점철되어 있었다. 


작은 아이가 견뎌내기에 너무 버거운 감정들의 무게를 알아주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나는 이런 감정들이 그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어른들이 방치하고 조장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엄마를 향해 악다구니를 쓰며 발악을 했다. 이미 시커멓게 타버린 내 속을 알아달라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나의 불행 역시 깃털처럼 가볍게 만드는 마법을 부렸다.

"네 아픔 따윈 아무 것도 아니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마법은 나에겐 전혀 먹히지 않았다. 배신감과 무력감은 분노로 이어졌다. 유년기에서 빠져나온 나는 그렇게 소리 없이 이를 악물고 분노를 삭이며 우울감에 서서히 병들어갔다


감정이라는 괴물이 삼켜 버린 나는 진짜 내 모습이 뭔지 알 수 없었다. 항상 화가 나 있고, 시시때때로 기분이 돌변하며, 조금만 힘들어도 사라지고 싶은 내가 진짜 나의 모습인 걸까? 나는 나를 마음껏 내보일 수도, 나를 좋아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나를 미워했던 날들은 참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예전에는 이런 걸 잘 쌓지 못했어요. 무너지기라도 하면 화가 나기 때문에 일부러 하지 않았거든요. 이제는 무너져도 즐겁게 다시 쌓아 올릴 수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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