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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백 May 15. 2024

아가씨, 초년운이 안 좋군요.

내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한 마디 "참 애썼다."

겉보기에는 평범하게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학교 수업은 빠지지 않았고 시험기간에는 도서관에서 벼락치기 공부를 하느라 밤을 새기도 했다. 약속을 이유 없이 펑크내지 않았다. 제일 이해가 안 가는 부류가 조모임을 하기로 해놓고 그 시간이 되면 잠수 타는 인간들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마음이 좋지 않아도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하는 사람이었다. 꾸역꾸역.


친구들과 수다 떨면서 까르르 웃고 튼튼한 몸은 좀처럼 아프지 않았으며 입맛은 365일 좋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만이 겪는 괴로움에 대해 토로해도 내가 원하는 공감을 얻어내지 못했다. 의지할 어른이 없는 상태로 자라온 것에 대한 고통을 설명하기에 나는 미숙했고 다른 사람의 아픔까지 폭넓게 공감하기에 내 주변의 사람들은 겨우 스무 살 남짓, 마찬가지로 미숙했다.


나는 억울했다. 이렇게 넓고 넓은 세상에 나의 괴로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누구 하나라도 알아줬으면 어서 나와 조금이라도 가까워졌다 싶으면 아무나 붙잡고 나의 괴로움을 기계처럼 줄줄 읊어대곤 했다.

우리 아버지는 돈으로 이 세상 가장 치사한 사람이다,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몰상식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엄마는 안 그래도 힘든 애들한테 화풀이를 해대지. 그러면서 한 번도 아이의 상처 따윈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이런 부모를 만난 건 정말 불운 아니야?" 

이런 나의 마음에 단 한 명이라도 공감해 주길 바라며.


중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못 들은 척 넘겼다. 아마 당황해서 그랬으리라. 불쌍하게도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이런 푸념의 집중포화를 받았다. 친구는 그날도 여지없이 내가 늘어놓는 아빠 흉을 듣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는 친구에게 나는 반문했다. "진짜 이상하지 않냐?" 친구로부터 돌아온 말은 이랬다.

"내가 어떻게 그걸 판단하겠어, 나는 모르는 분인데.."


그래, 내 친구들은 어찌나 다 올곧게 자랐는지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비난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그대로 적용하며 사는 애들이었다. 부모는 감사해야 할, 사랑해야 할 대상인데 멀쩡하게 생긴 애가 눈앞에서 거칠게 부모 험담을 늘어놓으면 너무나 불편했을 것이다. 그 불편함을 뚫고 이 아이가 듣고 싶은 말이 과연 무엇일지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나부터가 타인에게 그러지 못했다.


아주 오래오래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그런 공감은 나도 같은 경험을 했다는 동질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명함에서 온다는 것을. 그런 현명함이 곧 삶의 지혜이고, 나의 부모님처럼 70년, 80년을 살아도 그런 지혜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2년을 사귀다 헤어진 남자친구는 나에게 마지막 충고랍시고 이런 말을 남겼다.

"너, 근데... 너네 집 그런 거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지인~짜 그렇게 생각하지 마."

아, 지금 생각해도 헤어진 건 백번 천 번 잘한 일이다. 어차피 끝난 사이라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아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척했지만 속에서는 천불이 일어났다.

'감히 너 따위가 내 괴로움을 판단해?'


친구들이나 연인에게 내 마음의 구멍을 메꿔주길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아직도 그 무신경한 말들을 떠올리면 화가 화르륵 일어나지만 어찌됐건 그들도 이제 겨우 20대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젊은이들이었다. 모두가 각자의 문법으로 살아가는 법을 찾는데 바빴다. 나는 그들보다 극복해야 할 문제가 좀 더 많았을 뿐. 신이 불공평하게 시험이나 취업이 아닌 다른 숙제를 나한테만 더 얹어준 것 같았다. 억울하다, 억울해.


용하게 잘 본다는 말을 듣고 사주카페를 찾아갔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으니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연애는 할지, 잘 살기는 할지,  정말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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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년운이 안 좋네요?"


뎅-뎅- 그 순간 나는 종소리를 들었다. 내가 이렇게 마음의 짐을 한가득 안고 살아가는 것은 나의 탓이 아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던 사실을 내 사주팔자가 증명해 주었다.


'네 탓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시지프스의 돌처럼 무겁기만 했던 마음의 수레가 아주 조금 가벼워졌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결코 내 잘못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억울했다. 왜 내가 이런 괴로움을 겪어야 할까? 이 억울함은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와 나를 화나게 했고 슬프게 했다. 나는 이성적이었고 또 감정적이었다. 지성을 발휘해서 깨달은 사실들에 마음은 요동쳤다. 나는 내 잘못이 아닌 일로 고통받고 있다. 누구도 내 처지를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나는 의지할 곳이 없다. 모든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한다.


억울함과 함께 외로움도 나를 찾아왔다. 다행히 나는 마음이 좋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을 꾸역꾸역 하는 사람이라, 엉킬 대로 엉켜진 문제의 타래를 아주 조금씩 풀어 나갔다. 그리고 수년 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역시 예상하지 못한 상대로부터 내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듣게 되었다.


풋풋한 신입사원 딱지를 달고 있었던 어느 날, 마침 일이 한가해 입사동기와 회사 메신저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던걸까? 대학 입학과 동시에 계속 일을 해야만 했던 내 신세타령을 했던 것 같다. 입사동기의 반응은 무척 자연스러웠지만 나에게는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너 진짜 고생 많았다. 너 진짜 열심히 살았구나."


이 당연한 말을 그동안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었네. 사무실 한켠, 내 자리에서 나는 그만 울어 버렸다.


푸릇푸릇하던 때, 마음은 푸르지 못했네요.A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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