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아래 설 너에게 06.
되갚을 능력이 없다고 연신 손을 내젓는데에도, 요원으로부터 사채쓰기를 집요하게 권유받으며, 리아와 한울, 호국은 6층 당직실로 향했다. 로비는 불이 전부 꺼져 있어서 필요 이상으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네 사람의 걷는 발소리가 고요한 복도에 울려 퍼져, 기묘한 느낌마저 안겨 주었다. 요원은 여전히 과장된 웃는 얼굴로, 당직실 내부를 찬찬히 살핀 뒤 이부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당직실 내부의 화장실을 사용하면 되니, 아침이 되기 전까지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갔다. 경직된 정적을 깨트린 것은 한울이었다.
“자, 그럼 움직여볼까.”
그는 고개를 양 옆으로 까닥이며 기지개를 폈다. 호국 역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두 사람은 별 다른 말 없이, 눈빛을 교환하곤 당직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리아는 그런 두 사람의 행동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한울의 팔에 살짝 매달렸다.
“행정 요원님께서 해가 뜨기 전까지 방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래서,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들을 겁니까?”
한울은 옅게 미소지었다. 다정한 목소리로, 그는 말을 이었다.
“무섭습니까?”
왜 일까, 그의 물음은 마치 ‘날 못 믿겠습니까?’라고 들리는 듯 했다. 리아는 매달렸던 팔을 자신도 모르게 내려놓았다. 그녀는 한울의 웃음에 홀린 듯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믿을 수 있어요, 라는 말을 하는 대신, 자신의 얼굴에서 시선조차 떼지 못하고, 충직한 개처럼 종종 뒤따르는 리아의 모습에, 한울은 작게 웃었다. 굳이 목줄까지 채우지 않아도 사랑스러운 강아지는 잘만 쫓아왔다. 호국을 선두로 세 사람은 당직실을 벗어났다. 숨소리마저 고요히 삼킨 채. 그림자조차 어둠에 감춘 채.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멈춰있는 것을 확인한 한울은 비상계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호국은 낮은 목소리로 한울에게 생각하고 있는 계획을 물어보았다. 움직이기 전, 그의 생각을 미리 들어둘 요량 같았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간략한 설명을 시작했다.
“비상계단을 통해, 행정 건물과 이어진 지하 층까지 내려갈거야. 그대로 옆 건물로 넘어가 지하에서부터 21층에 있다는 쿠로 키츠네의 방까지 걸어서 올라간다.”
호국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늘 밤은 참 길겠구나.”
리아는 한울의 등 뒤에서 그의 옷깃을 잡고 걸었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비상등 하나 켜진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엉덩이 뒤로 꼬리라도 난 듯 리아는 엉덩이를 조금 뒤로 빼고, 종종 걸었다. 호국은 뒷따르는 한울과 리아를 챙긴 뒤, 5층의 비상문을 열었다. 열린 틈으로 환한 빛이 세 사람을 크게 감쌌다.
“뭡니까, 당신들은···”
낯선 남성들이 복도를 오가다가, 비상구 문에 우뚝 서 있는 한울 무리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모두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흑호교의 직원들로 보였다. 호국은 넉살좋게 씨익 웃으며 손 인사를 해보였다.
“안녕!”
호국의 살가움에 남성들은 넋이 나간 듯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거침없이 비상구 문 밖으로 나가 남성들 한 가운데에 자릴 잡고 섰다. 펑퍼짐한 법복을 입고 있었지만 옷 위로 충분히 느껴지는 육감적인 몸매에 호국과 마주 선 남성 중 몇 명은 얼굴을 붉혔다. 욕정하는 사내들 앞에서, 호국은 손목에 감아뒀던 염주를 꺼내 빙글빙글 돌리며 눈을 감았다.
“탐진치로부터 중생을 구원하기는 커녕···”
말 끝을 흐렸던 그녀는 바뜩 눈을 치켜떴다.
“애욕을 불러일으키는 소승의 죄가 태산만큼 크옵나니, 쌓여가는 이 업보를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뒷따라 5층 복도로 들어온 한울이 혀를 찼다.
“애욕같은 소리 하네.”
“너는 어릴 때부터 매일 보니 별다른 감흥이 없는 거야. 보통의 경우, 이 정도의 파괴력 있는 몸은 어딜가나 이성들로부터 귀한 대우를 받는다구.”
“파괴력 같은 소리하네, 정말···”
“재발법사인 내가 굳이 법복을 고수하는 이유도, 이런 차림이 아니면 수많은 사내들의 번뇌를 부르는 이 죄많은 몸매를 가리기 위해···”
“시끄러워, 땡중아.”
면박을 준 한울은 품에서 검은 부채를 꺼내 복도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실내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닥쳐, 복도에 놓인 집기들이 뒤로 조금씩 밀려났다. 난데없는 소란에 내부에 있던 직원들도 모두 얼굴을 빼고 복도를 내다보았다. 한울은 빠르게 그 수를 셌다.
“보이는 머리가 모두 열, 열 하나, 열 둘···”
한울은 부채를 넓게 펴고 몸을 낮춘 뒤, 직원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한울의 몸에 여러 줄기의 바람이 감기며, 움직임이 놀라울만큼 빨라졌다. 호국을 제치고 앞으로 나선 그는, 팔을 펼쳐 무리의 중앙에 자리 잡았다. 당황해 덤성거리는 직원들 어깨, 그리고 이마를 부채의 살로 톡톡 내리치자, 한울의 부채에 닿은 순서에따라 사람들은 차례대로 고꾸라졌다. 리아는 자신이 차 안에서 잠들었던 것과 같은 일이 다시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앞 줄에 서 있던 직원들이 맥없이 쓰러지자, 뒷 줄의 직원들은 우왕좌왕했고, 그 중 몇몇은 황급히 무전기를 꺼내와 어딘가로 상황을 보고했다. 한울은 무전기를 들고 송신하는 무리들을 앞서 제압하기 시작했다. 부채의 살이 머리에 강하게 닿았다. 직원은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떨고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한울은 여덟, 아홉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전부 쓰러뜨렸다. 그리고 남은 두 세명의 사람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이 곳은 흑호교 직원들의 숙소인가?”
한울의 질문에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호국이 대신 대답했다.
“질문이 너무 늦잖아.”
“머릿 수가 쓸데없이 많았잖아. 대답할 입은 하나면 충분하고···”
순간, 남은 직원 중 덩치가 가장 큰 직원이 큰 소릴 내며 한울에게 덤벼들었다. 한울은 즉시 부채를 펼쳐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자 직원은 강한 기류에 떠밀려 뒤로 밀려났다. 우탕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구석에 처박힌 그는 동공의 촛점이 풀리더니 결국 고개를 떨궜다.
“민간인을 상대로 좀 살살하라고.”
호국이 혀를 차며 잔소리를 늘어놓자 한울은 품에 부채를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기이한 모양을 만들며, 숨을 들이켰다.
“그래. 진작에 그랬어야지.”
수인을 맺었던 한울은, 빠르게 손의 모양을 바꿔 직원의 명치를 가볍게 두드렸다. 한울과 닿은 직원은 숨을 크게 들이키더니 즉각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리아가 놀라 발을 동동거리자, 호국은 그녀의 등을 쓸어내려주었다. 한울은 남은 직원들의 가슴을 차례로 두드렸다.
“잠깐 기절시키는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호국의 말에 리아는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울님을 믿는거야. 사람에게 해악을 끼칠 사람이었다면, 애초 나를 구해주지도 않았을거야. 리아는 한울의 반듯한 등을 바라보았다. 등은 신뢰의 폭만큼 넓게 느껴졌다. 그는 고개만 살짝 돌려 뒤에 선 호국과 리아에게 말을 건냈다.
“정리가 된 것 같으니, 4층으로 내려가도록 하자.”
사람이 널부러진 5층 복도를 지나서, 세 사람은 도로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리아가 앞장 서서 걸었다. 자신도 뭔가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건 길잡이 정도 였기에, 리아는 용기를 내 일행의 선두에 섰다.
“이게 무슨 향이지? 어쩜 이렇게 달콤한 꽃 향기가···.”
4층의 문이 열리기도 전에, 닫힌 문 너머로 감미로운 꽃향기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과도한 달콤함에, 한울은 코를 싸매쥐었다.
“마약 아니야?”
“설마···”
한울과 호국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데, 리아가 용감하게 4층의 문을 열었다. 열린 문으로 거대한 두께의 꽃 향기가 밀려와 세 사람을 집어 삼켰다. 리아는 몇 번의 기침을 한 후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이 향기는 분명히···.
“4층은 도화단의 숙소인가 봐요.”
리아의 말투는 확신에 차 있었다. 한울은 쿨럭쿨럭, 기침을 몇 번하고서 대꾸했다.
“도화단? 쿠로 키츠네의 성 노리개들 말하는 건가요?”
“쿠로 키츠네님의 신부들을 말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 말이 그 말이에요.”
“한울님은 본인의 신부를 두고 성 노리개라고 말하나요?”
억울함을 느낀 듯 한울이 뭔가 항변하려 하자, 호국이 그의 등을 툭 쳤다.
“리아씨와 언쟁은 그만.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어.”
복도에는 잔잔한 빛이 어려 있었다. 키가 몹시 작고, 고양이를 닮은 인상의 여성이,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복도를 걸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옷의 노출 정도로 보아, 그녀는 도화단원이 분명했다.
“아고고, 여자들을 상대로 폭력을 쓸 수는 없는데···.”
낮게 읊조린 호국의 목소리를 들었던 걸까, 도화단원은 소리의 근원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고리를 잡고 있는 리아와 눈이 마주쳤는지, 그녀는 앗, 하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리아는 당황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냈다.
“저, 저, 저기···. 도화단에 가입하려고 하는데요, 안내를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도화단원은 놀란 듯 멈춰 서 있다가, 리아의 이목구비를 면밀히 살펴보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그녀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리아는 숨을 꼴깍 삼키곤 단원에게 걸어갔다.
“제 일행도 있는데, 함께 안내를 해 주세요.”
“일행 분이요?”
도화단원은 리아의 등 뒤로 보이는 호국과 한울의 모습에 조금 어깨를 떨었다. 특히 한울을 보고 그녀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떨리는 목소리는 흡사 염소를 뺴닮아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오신 거에요, 여기는 금남의 구역이에요.”
“금남의 구역이요? 저희는 행정요원 분께 당직실을 안내받아서···.”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3층에는 절대 가시면 안돼요.”
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원은 리아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3층은 도화단원들의 숙소예요, 4층은 보시다시피 연습실이고요.”
단원은 반쯤 열려있던 문을 밀어, 내부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기둥 하나 없는 커다란 방의 전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벽면에는 온통 거울이 붙어있었다.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는 여성 단원들의 모습도 보였는데, 그들은 한울을 보고 작게 소리를 질렀다.
“거 참···.”
한울은 머리를 긁적였다. 단원은 리아의 손을 잡고, 작은 방으로 향했다.
“아마 여기 어딘가에 입단 지원서가 몇 부 있을 거에요. 사실 이런 행정 절차는 심례당에 가셔서 하셔야 하는건데···.”
중얼중얼거리던 단원은 펜과 종이를 꺼내서 리아에게 건냈다. 그녀는 종이가 꾸깃거리는 게 마음에 걸렸던지, 종이를 손으로 눌러 바르게 펴려 애썼다.
“선생님의 이름을 비롯한 인적 사항을 공란에 적어주세요.”
리아는 테이블에 몸을 기대고서, 빈 칸을 대충 채워내려 갔다. 리아가 입단 지원서를 작성하는 동안, 호국은 연신 주위를 살펴보며 한울과 눈빛을 교환했다. 누가봐도 너무나 수상쩍은 세 사람이었지만 도화단원은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한 듯 방긋대고만 있었다.
“리아씨로군요. 참 예쁜 이름이에요,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리아의 지원서를 넘겨보던 도화단원은, 고양이처럼 뾰족한 눈매로 사르르 미소지었다. 그리곤 자신의 작은 가슴에 두 손을 살짝 얹었다.
“리아씨, 제 이름은 사토 히나 佐藤 陽菜예요. 우리 앞으로 잘 지내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