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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회승 Jun 19. 2023

나는 그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았다.

집 앞에 자주 가는 약국이 있다. 약국을 가려면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야 한다. 그날도 약을 사러 빨간 신호가 파란 신호로 바뀌기를 기다리며 약국 건너편에 서 있었다. 그런데, 순간 나의 몸은 얼어붙었고, 나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그 약국을 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그와 너무나도 닮은 사람이 그 약국을 들어가고 있었다. 순간 너무 놀라 덜컹 내려앉은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고, 누가 볼까 갑작스레 쿵쿵 뛰는 가슴을 잡으려 애썼던 것 같다. 그런 나의 모습을 스스로에게도 들켜버린 것 같은 창피함, 때론 아직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순간 자존심이 몹시 상하기도 했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을 잘 다니던 내가 좀 늦은 나이에 극작 공부를 하겠다고 다시 대학을 입학하게 된 것은 바로, 사랑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진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었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나를 자랑스러운 연인으로, 멋있는 사람으로 여기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그렇게 잘 보이고 노력하고, 열심히 그를 사랑한 것이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이다. 청춘의 사랑은 늘 아프다. 그저 흔한 지나가는 청춘의 사랑이겠지만, 하얀 종이에 잠깐 스쳐 손에 베인 상처도 순간의 고통은 크다. 시간이 지나면 딱지도 앉고 고통도 사라지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건 사랑일까? 미련일까?     


지금도 가끔 아주 가끔 그의 얼굴,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리곤 한다. 5년이라는 긴 연예를 했지만, 어느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절절한 사랑도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을법한 흔한 연예였다. 하지만, 특별한 게 하나 있었다면, 그의 직업이 연극 연출가였다는 것이다. 때로는 영화산업, 디렉터로도 참여해 그가 수입해 온 영화를 보러 함께 가기도 했었다. 그 모습이 제법 멋있어 보이기도 했었고, 또 그의 일에 참여하고 싶기도 했었다. 평소 관심이 있던 분야였지만 나의 가정형편이 그닥 좋지 못한 탓에 그동안 꿈으로만 남겨두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었다.           



 그때, 나는 서른을 코앞에 둔 이십 대의 마지막 가을을 쓸쓸하게 보내고 있었다. 약속도 없는 주말이었지만, TV를 친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느덧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버릇이 돼 버리기도 했다. 그날도 나는 대학로의 뤼미에르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홀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마로니에 공원 앞에 있는 조금은 사람이 덜 붐비는 파랑새 극장 앞 벤치에 앉아, 가방을 무릎 위에 두고,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지나다니는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랫배가 볼록 튀어나온 사람이 내 앞을 가로막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을 걸어왔다.
“저 지금 몇 시쯤 됐습니까?”                                                            <나의 소설 중에서>          



나는 그가 들어간 그 약국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서 있었다. 횡단보도 건너편과 내가 서 있는 맞은편 도로는 마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해 있는 것처럼 분명히 나뉘어져 있는 듯했다. 순수하고 풋풋했던 나의 청춘의 시간들, 비록 현실에 대한 자각으로 나의 꿈을 일찌감치 접어야 했었지만, 퇴근 후, 나는 자유로웠다. 종로 3가에 있는 피카디리극장, 단성사극장 등을 다니며 영화를 마음껏 즐겼고, 대학로에서는 연극공연과 길거리공연도 자주 봤으며, 콘서트, 미술관 관람 등등 혼자였지만 자유롭게 못다 한 꿈을 문화생활로 채우며 나름 멋진 청춘의 시간들을 보냈었다. 지금 이 횡단보도를 건너면 마치 다시 자유로웠던 나의 청춘의 시간으로, 과거로 돌아갈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른쪽 발하나를 떼어 앞으로 내밀어 본다.      


그래, 착각일 것이다. 그러나 다시없을 것만 같았던 스무 살 마지막 청춘의 설레임과 떨림을 느꼈다. 그가 나오기를 아니 다시 볼 수 있기를 그대로 서서 기다렸다.     


그와 함께 다녔던 공원들, 함께 봤던 영화 ‘노팅힐’, 마지막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화창한 오후의 한 공원 벤치, 임신한 줄리아로버츠가 책을 보는 휴그랜트의 무릎에 편안히 누워 오후를 즐기는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해 보였다. 유명스타의 삶보다는 평범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편안한 삶을 꿈꾸었던 여주인공의 삶이 나 또한 꿈꾸었던 삶이기에 그와 함께 보며 나도 같은 삶을 꿈꾸었다. 그 외 연극 공연 등, 그로 인해 참 다양한 경험과 자극을 받았었다. 나에게 큰 아픔과 슬픔을 주었지만 동시에 나를 성장시켜 준 내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얼마간의 기다림, 그 잠깐의 기다림도 나를 다시 설레게 했다. 마치 스무 살의 그 아름다웠던 그때 그 시간처럼 말이다.      



 꺾어 신은 운동화에 자글자글 주름이 잡힌 바지, 볼록 나온 아랫배, 둥그런 안경을 한 그의 모습을 본 순간, ‘휴우!’ 한숨부터 절로 나왔다. 불량배는 아닌 것 같았지만, 왠지 건달 같은 사람이 집적대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하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치게 됐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마치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미소에 나는 나도 모르게 응답을 했다.
“아! 네 저...”
그는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기를 따라오라는 듯 먼저 앞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나는 그의 당당함에 기막히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어떤 이끌림이었는지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를 따라간 곳은 한국의 전통적인 색채가 물씬 풍기는 찻집이었다. 그런 찻집이 익숙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곳이 낯설지가 않았다. 오래전에도 한 번은 와봄직한 익숙함이랄까.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 사실은 영화관에 들어갈 때부터 지켜봤습니다. 한참 망설이다 말을 걸었는데 거절하시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는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미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때 같이 마셨던 녹차 때문이었을까? 나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를 그렇게 만나 나의 가슴속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그에게 젖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흐트러진 모습은 연극연출가라는 직업 때문이란 걸 한참 뒤에 알았다.                                                                                                 <나의 소설 중에서>         



그가 나왔다. 동그란 얼굴의 검은 안경, 자그마한 키 살짝 긴 장발 머리. 그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영화 속 슬로우 장면을 보듯 약국을 나온 그의 거리는 과거와 현재의 경계에 있었다. 나의 시선은 그 동작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나의 발은 그의 움직임에 따라 한 발짝 더 앞서 나갔다. 그는 약봉지 하나를 들고, 약국을 나와 나를 등지고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그를 나는 멀찌감치 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신호가 빨간 신호에서 파란 신호로 바뀌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앞서 나가지 않았다. 그저 나의 시선은 그가 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뒤를 따라가고만 있었다.           



 그래서일까! 불규칙한 그의 생활 태도와 자유분방한 그의 행동 때문에 그 후로, 우리는 말다툼이 끝이질 않았다. 그로 인해 나는 몇 번의 헤어지자는 말을 그에게 내뱉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말을 거둬드리는 쪽도 나였다.     
 앞으로도 만났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그를 그리워할 시간들이 두렵기도 하지만, 이제 그를 잊기로 했다.                                                                         <나의 소설 중에서>        

  


그리고 그가 거의 보이지 않을 때쯤 뒤돌아 집으로 향했다. 나의 청춘의 사랑은 드라마처럼 아름답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았다. 서울에 있어야 할 그가 여기 파주까지 왔을 리가 없다. 아니 왔을 수도 있다. 공연을 하는 사람이니 공연 때문에 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이건 아니건 이제 상관없다. 가끔 생각했다. 혹시 대학로에서 혹은 다른 곳에서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난다면, 도도한 여자처럼 얼굴 꼿꼿이 세우고 모른 척해야지! 했던 내가 순간 바보처럼 얼음이 되어 멍하니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니... 늘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이 약자이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뒤돌아 집으로 오면서 피식 웃었다. 잠시나마 풋풋했던 청춘의 설레임이 나쁘지 않았다. 시간이 나면 대학로를 한번 다시 가보려고 한다. 내 청춘의 한 페이지를 꺼내 보면 그곳에 나의 청춘과 다시 한번 조우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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