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서른을 코앞에 둔 이십 대의 마지막 가을을 쓸쓸하게 보내고 있었다. 약속도 없는 주말이었지만, TV를 친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느덧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버릇이 돼 버리기도 했다. 그날도 나는 대학로의 뤼미에르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홀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마로니에 공원 앞에 있는 조금은 사람이 덜 붐비는 파랑새 극장 앞 벤치에 앉아, 가방을 무릎 위에 두고,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지나다니는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랫배가 볼록 튀어나온 사람이 내 앞을 가로막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을 걸어왔다.
“저 지금 몇 시쯤 됐습니까?” <나의 소설 중에서>
꺾어 신은 운동화에 자글자글 주름이 잡힌 바지, 볼록 나온 아랫배, 둥그런 안경을 한 그의 모습을 본 순간, ‘휴우!’ 한숨부터 절로 나왔다. 불량배는 아닌 것 같았지만, 왠지 건달 같은 사람이 집적대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하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치게 됐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마치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미소에 나는 나도 모르게 응답을 했다.
“아! 네 저...”
그는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기를 따라오라는 듯 먼저 앞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나는 그의 당당함에 기막히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어떤 이끌림이었는지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를 따라간 곳은 한국의 전통적인 색채가 물씬 풍기는 찻집이었다. 그런 찻집이 익숙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곳이 낯설지가 않았다. 오래전에도 한 번은 와봄직한 익숙함이랄까.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 사실은 영화관에 들어갈 때부터 지켜봤습니다. 한참 망설이다 말을 걸었는데 거절하시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는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미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때 같이 마셨던 녹차 때문이었을까? 나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를 그렇게 만나 나의 가슴속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그에게 젖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흐트러진 모습은 연극연출가라는 직업 때문이란 걸 한참 뒤에 알았다. <나의 소설 중에서>
그래서일까! 불규칙한 그의 생활 태도와 자유분방한 그의 행동 때문에 그 후로, 우리는 말다툼이 끝이질 않았다. 그로 인해 나는 몇 번의 헤어지자는 말을 그에게 내뱉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말을 거둬드리는 쪽도 나였다.
앞으로도 만났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그를 그리워할 시간들이 두렵기도 하지만, 이제 그를 잊기로 했다. <나의 소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