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관한 이야기
어릴 적 우리는 들어왔다.
튀지 말 것. 주변을 살필 것.
주변 사람들과 융화될 것.
엄마가 데려다 주는 유치원을 다니다 혼자서 총총 다녀오는 생애 첫 사회인 초등학교에 갈 때 학교에 가려고 나서는 아이에게 엄마는 말한다.
"조심히 다녀오구. 친구들이랑 싸우지 말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한국어는 주로 문장의 무게중심이 뒤에 쏠리는 편이며 이러한 특징은 문장들을 모은 대화에서도 적용이 된다. 그렇다면 학교에 가는 아이의 뒤에서 제 몸 만큼 커다란 가방을 매고 가는 아이에게 엄마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문장일 것이다.
친구들이랑 싸우지 말 것.
선생님 말을 잘 들을 것.
그리고 이 둘은 모두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는 친구란 같이 놀고 같이 맛있는 걸 먹는 대상이지 싸우는 대상이 아니어서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잘 모른다. 선생님 말은 원래 잘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이는 엄마가 하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무슨 대답을 하면 엄마의 얼굴에서 걱정이 덜어지는 지는 안다.
아라써(알았어)
가끔, 알겠습니다. 다녀올게요 같은 다섯 글자를 말하는 아이도 있지만 특별히 엄하지 않은 보통의 집에서의 아이는 세 글자로 말하곤 한다.
알았어. 맛있어. 배고파.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
가정이라는 아주 작은 사회. 기초적 단계의 사회로부터 출발해 본격적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학교라는 2차 사회에 가는 아이에게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관계인 것이다.
형제 자매 말고. 처음보는 친구들과 관계를 잘 맺을 수 있을까?
부모 말고. 과목도 다양한 낯선 선생님들의 말을 잘 들을 수 있을까?
부모들은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관계를 맺는 것. 타인과 나의 공간을 정의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잘 살아가는 첫 발자국이라는 것을.
때로는 어른에게도 버거워 고통 속에 잠기도록 하는 관계의 늪. 자신의 아이의 관계의 숲은 늪이 없이 풍성한 잎사귀들로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직장에 다니고 어른들만 모여 있는 공간에 나가며
각기 다른 사람들과 서로 공감하다 보면
어릴 적 누구나 들었을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난다.
조심히 다녀오고.
친구들과 동료들과 싸우지 말고.
선생님과 웃분들의 말 잘 듣고.
결국 그런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자라고 어른이 되어도 인간의 삶의 고통은 관계에서 오게 되는 것이다. 옆 자리의 친구가 나를 힘들게 한다. 같은 부서 옆 자리 동료가 사람을 힘들게 한다. 그곳이 어떤 곳이든 어떤 조직이든 간에 그곳에서 함께하는 사람이 좋다면, 우리는 기꺼이 몸의 힘듦을 견뎌낼 자신이 생긴다. 뭐, 어때. 해보면 되지.
하지만 그 곳의 사람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못난 사람이라면. 그때 느끼는 고통은 몸의 피로함, 고통 그런 것보다 더욱 깊고 세게 나의 평온할 마음에 파고들게 된다.
버텨내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야 하는 것이다.
잘 산다는 것. 그것에 별 것이 있을까.
그저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사이가 좋아
내가 하는 일에 생긴 부족한 면을 채워주고
그들이 하는 일을 내가 거들어 주고
서로가 서로의 삶에 각기 한 줄 씩을 그렇게 걸치다 보면
삶은 눈치 챌 겨를도 없이 탄탄해 지겠지.
직장으로 가는 길이면 나서는 집의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떠올려 본다.
조심히 다녀오고.
친구들과 싸우지 말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