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
학교선배를 만나기로 했다.
이국 만리에서 안면식도 없는 선배가 단지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만나자 했을 리는 없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약속시간을 잡는데, 한 달에 하루 쉬는 나와 자카르타에서 사는 선배가 약속을 잡는 건 쉽지가 않았다. 약속 날짜가 계속 미뤄지자, 선배는 내가 사는 곳까지 찾아온다는 말을 한다. 거절했다. 대신 현장 소장님께 양해를 구해 연락을 주고받은 주 일요일에 선배가 사는 곳 근처에서 약속을 잡았다. 내가 시간이 많아서 숙소에서 한 시간 반이나 걸리는 자카르타로 간다고 했던 건 아니다. 그때 즈음 내가 살던 숙소가 뉴스에 나왔었다.
빌리지 안쪽에서 흐르던 작은 개울가에서 7m짜리 아나콘다가 나왔다. 다행히 사망자나 피해는 없었지만, 100여 가구가 사는 작은 빌리지 한가운데서 아나콘다가 나온 건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걸어서 10분 거리엔 작은 몰도 있었고, 한인마트도 있는. 그리 시골은 아닌 동네였기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내가 이런 후진 동네에서 사는 걸 보여주고 싶지가 않았다. 사실 아나콘다 이야기를 적은 건 핑계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동네는 후져도 당당했었다. 다만, 현장을 뺏기고 A현장을 겉돌면서 쓸데없는 자격지심이 생긴 탓이다.
일요일 저녁 운전기사에게 소정의 팁을 주고 자카르타로 향했다. 약속시간은 6시였지만, 넉넉잡아 4시쯤 출발했다. 자카르타의 악몽 같은 교통체증을 알기에 일찍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 빨리 도착했다. 5시쯤 도착해 오랜만에 자카르타 부촌을 구경하며 시간을 때웠다. 신기했던 건. 한국에서 처음 왔을 때 촌스럽고 없어 보였던 자카르타 부촌을, 시골생활 6개월 만에 다시 와보니 오색찬란한 빛깔에 적응이 안 된다. 시골사람 다 됐다. 동네에서 놀라다 보니 약속시간에 가까워졌다. 약속한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선배가 예약한 자리는 1층 한가운데 자리였다. 2층에 있는 방으로 옮기고 싶었지만, 나보다 12살 많은 선배의 예약을 마음대로 바꿀 만큼 배짱이 두둑하지 못했다. 식당 한가운데서 발가벗겨진 듯한 느낌으로 선배를 기다린다. 마침내 식당문이 열리고 선배가 들어온다. 그런데 선배혼자가 아니다. 선배는 부인과 딸 2명과 함께 들어왔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선배의 가족과 밥을 먹었다. 식사가 나오기 전, 회사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말로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하지만, 운을 띄운 뒤 선배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그리고 자신의 가정이 얼마나 화목한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만약 선배가 내게 연봉을 더 준다고 이직을 권했다면 단호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배는 내가 이직을 선택하면 얻을지도 모를 값진 행복을 보여줬다. 자존감이 낮었던 나는 선배의 설득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이직을 결정했다.
돌이켜 보면 후회만 남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나를 뽑아준 건설회사에 의리를 지켰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