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 04
03 서울의 밤
한강을 지나는 2호선 지하철.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과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늦은 시간 지하철에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얼굴들이 많습니다. 그 얼굴 위로 아름다운 한강의 야경이 덧씌워지니 진짜 이상해 보였습니다. 세상은 나를 이해하는 듯 이해해 주지 않고 어쩐지 서울살이는 조금 불공평한 것 같고, 지금 이 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 지하철에서 가사를 적었습니다.
달리는 지하철 흩어진 얼굴 속에 / 나도 모르게 문득 떠오른 기억
아무 일 없는 듯 평온한 표정 뒤로 / 내게만 들리는 불안한 심장소리
완성되지 못한 당신과 나 사이에 / 의미 없던 세상 다 무너지고
마주하지 못한 입술과 입술 사이에 / 달콤하기도한 퍽퍽한 내음만
옷 속을 흐르는 불안한 땀방울 / 코끝을 스치는 싸구려 향수 냄새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는지 /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축축한 서울의 밤
불안하게 어딘가로 달리는 지하철의 느낌을 내고 싶어 쿵짝쿵짝 이어지는 기타 연주로 곡을 만들었습니다. 화려한 도시의 지하 술집이나 뒷골목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서 비올라 연주자분께 게임 ‘메이플스토리’ 속 도시인 ’커닝시티’ 주제곡 같은 느낌으로 연주를 해달라고 부탁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조금 혼란스러워하셨던 기억도 나네요.
04 귀마개를 파세요
원치 않는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여성, 20대, 누나, 사원, 학생, 한국인, 자취생, 서민, 여자친구, 애인, 딸, 장녀’ 등. 당시의 저에게 붙었던 이름입니다. 어느 날 이러한 호명이 몹시 불편하게 다가왔습니다. 호칭 뒤에는 그에 걸맞은 기대가 따라옵니다. 수행해야 하는 역할이 있고 거기서 벗어나면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려요. 그래서 나를 부르는 모든 이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완벽히 사라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귀마개를 파세요’라고 했습니다. 나를 호명하는 모든 것에게 귀마개를 팔라고 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제없이 사라지려면 그가 바라는 ‘정당한’ 대가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당신이 나를 호명하는 것은 한낱 소음에 불과하고 나는 듣고 싶지도, 기대에 부응하고 싶지도 않으니 귀마개를 사서 당신의 소리를 듣지 않겠다는 표현이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무언가 소비하는 느낌이 아닙니다. ‘더러우니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쪽에 더 가까워요.
슬픔보다는 화가 나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내면에 화가 가득 있지만, 터뜨리지는 않고 꾹꾹 눌러 담아 교양 있게 화를 내는 사람 같아요. 그래서 공연장에서 노래를 부를 때도 약간은 화가 나 있습니다.
이 곡은 2016년쯤에 만든 곡입니다. 그때는 제가 음악가로 살리라고 생각도 해보지 않았고 그저 취미로 화풀이용으로 음악을 하던 시기입니다. 스스로 노래를 못한다고 생각해서 작곡을 할 때고 늘 보컬 멜로디의 높낮이가 많지 않게 만들어왔는데, 이 노래는 그래도 화를 낼 듯 말 듯 하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당시의 제가 잘 쓰지 않던 높은 음도 사용해서 멜로디를 짰습니다. 약간 놀리는 듯한 느낌이 났으면 해서 트로트풍으로 만들어보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리 높은 음도 아닌데 당시에는 너무 힘들고 부끄러워서 늘 공연 전에 눈을 질끈 감고 눈앞에 나를 가로막는 것들을 떠올리면서 공연을 했어요. 그럼 저도 모르게 화가 나서 노래를 잘 부를 수 있게 되기도 했습니다.
오래전에 만든 노래지만 애착이 많이 가는 곡이에요. 부를 때마다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거든요.
서울의 밤 : https://www.youtube.com/watch?v=-nuiunB_Y5M
귀마개를 파세요 : https://www.youtube.com/watch?v=3QaF5Cyxblg
<귀마개를 파세요>
귀마개를 파세요 내게 귀마개를 파세요
누가 나를 찾던 신경 쓰지 않게
귀마개를 파세요 내게 귀마개를 파세요
누가 나를 부르던 돌아보지 않게
실은 그게 나를 부르는 것도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어요
실은 그게 나를 부르는 것도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어요
귀마개를 파세요 내게 귀마개를 파세요
이 소음에 끝엔 남는 게 없죠
귀마개를 파세요 내게 귀마개를 파세요
내게 하려던 말엔 관심이 없어요
실은 내게 하려던 얘기도 아니잖아요 그냥 시끄러울 뿐인 소리들은
내게 하려던 얘기도 아니잖아요 그냥 시끄러울 뿐인 소리들은
이제 그만 좀 해요 어차피 우리 다 알고 있잖아요
귀마개를 파세요 내게 귀마개를 파세요
이 소음에 끝엔 남는 게 없죠
귀마개를 파세요 내게 귀마개를 파세요
나를 부르지 않으면서 찾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