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이 신앙을 삼킬 때
“우리의 존재를 숨기는 게 나은가요? 아니면 드러내는 게 나은가요?”
웜우드는 삼촌 스크루테이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노련한 악마 스크루테이프는 깃펜을 들어 조카 웜우드에게 답장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인간들의 영혼을 다루는 복잡한 보고서들이 가득했습니다.
최고 사령부의 명령에 따르면 당분간은 정체를 숨겨야 한단다.
아직은 우리를 드러낼 때가 아니야
인간들이 실재하는 영의 존재(즉 저 하늘에 있는 원수)는 거부한 채,
막연히 ‘힘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우주의 생명력, 정신분석 포함 등등)’들을
숭배하는 날이 오면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지.
하지만 그 전까지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야지.
혹시라도 환자가 악마가 정말 존재할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걸랑
몸에 딱 달라붙은 빨간 타이즈를 입은 꼴 따위를 떠오르게 하면 효과적일게다
환자는 자기가 얼마나 합리적인데
이런 우스꽝스러운 존재를 믿을 수는 없지 않느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테지.
그러면서도 오늘의 운세나 액막이 부적에는 기웃거리고.
우리는 인간 환자에게 진정한 신앙이 들어설 자리를
이런 잡동사니들로 가득 채워버려야 한단다.
웜우드는 또 스크루테이프에게 질문했습니다.
"내가 맡은 환자, 도윤이를 극단적인 평화주의자로 만들지,
극단적인 애국주의자로 만들지 고민이에요"
원수에 대한 극단적인 헌신만 빼놓는다면,
극단적인 경향은 어느쪽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부추길 만하지.
특히 지금처럼 편 가르기 좋아하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단다.
사람들이 싫어하고 무시하는 일로 뭉친 집단은
외부세계에 대해서 증오를 키워 나가지.
이들이 당당한 이유는 대의명분을 갖고 있기 때문이란다.
자신들에게는 개인적인 차원을 뛰어넘는 대의가 있다고 주장한단다.
파벌짓고 편가르기 특유의 긴장감과 방어적인 독선에
허우적대는 이들의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나의 게으른 조카 웜우드야,
역사적인 사례들을 찾아서 공부해 봐라.
아주 오래전 고린도교회에서 지들끼리 파벌로 나눠질 때부터
우리는 얼마나 많은 흡족한 결과들을 보아왔느냐.
평화주의자든 애국주의자든 어떤 노선을 취하든 네가 할 일은 단순하다.
그저 신념이 신앙이나 종교보다 앞서게 하라고.
성경에서 악을 미워하라고 했으니
악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증오하게 해.
상대방이 의견을 듣기보다 비난하고 조롱하게 해.
스크루테이프는 편지에 결정적인 비책을 적었습니다.
"가장 맛있는 영혼은 자신의 신앙을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는 자들이지.
환자가 기도를 할 때, 세상을 구원해 달라고 빌게 하지 마라.
대신 '우리 편이 이기게 해주세요' 혹은
'저 원수들을 심판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게 만들렴.
신앙이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는 순간,
우리의 승리가 바로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다.
웜우드는 도윤이 교회에 앉아 있는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자신과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이들에 대한 저주로 가득했습니다.
웜우드는 도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그의 증오가 곧 '신의 정의'라고 착각하도록 부추겼습니다.
도윤은 자신이 아주 의롭다고 믿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주 잘했다, 웜우드야."
스크루테이프가 마지막 편지를 마무리했습니다.
"도윤이 대의명분에 도취되어 이웃을 미워하게 되었다면, 우리의 승리는 확실하다.
우리는 그들끼리 사랑의 이름으로 칼을 휘두르게 만들면 된다."
웜우드는 이제 도윤의 짙어진 그림자를 뒤따르며 은밀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알겠어요, 삼촌. 생각보다 아주 쉬운 게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