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꼭대기와 골짜기를 건널 때
사랑하는 웜우드에게
환자의 믿음이
예전만큼 뜨겁지 않고 시들시들했다고 희망적이라며 기뻐하는 꼴이라니.
착각하지 마라.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긴장해야 할 때야.
‘악마양성대학’에서는 대체 뭐하고 있길래,
너같이 새파란 새내기 악마 녀석들에게
‘기복의 법칙’에 대해 가르치지도 않는단 말이냐?
인간은 순수한 영적 존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한 동물도 아니다.
그들은 영혼과 육신이 결합된 ‘양서류’ 같은 존재이지.
영으로서 그들은 영원한 세계를 지향하지만,
동물로서 그들은 시간 속에 살며 온갖 변화를 겪고 있지.
그래서 그들의 삶은 끊임없이 꼭대기로 올라가고
또 골짜기로 떨어지는 파동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기복의 법칙이다.
네 환자를 잘 관찰해봐
일에 갖는 흥미도, 친구들을 향한 애정도,
몸의 욕구도 죄다 오르락내리락하지 않든?
그러니까 지금 네 환자가 겪고 있는
메마르고 무덤덤한 느낌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현상에 불과하단 말이야.
그러니 네 솜씨 때문이 아니니 제발 겸손해라!
인간이 영적인 열정으로 가득 차서
'원수'를 뜨겁게 사랑한다고 느끼는 시기가,
소위 인간이 꼭대기에 있을 때라고 할 수 있지.
이때 너는 당황하겠지만, 사실 이때는 우리에게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
인간의 감정은 안개와 같아서 금방 걷히고 사그라들기 마련이니까.
진짜 문제는
그 뜨거운 열정이 사라지고 난 뒤,
즉 ‘골짜기’를 지나는 시기에 발생한다.
환자가 기도를 해도 아무런 응답을 듣지 못하는 것 같고,
선한 일을 해도 즐거움 대신 기계적인 의무처럼 느끼지.
너는 이 메마른 시기를 틈타 그를 유혹하려 들겠지만...
조심해야해 !
이 골짜기야말로 원수가 인간을 진짜 자신의 자녀로 훈련시키는 장소야.
그렇다면 원수는 왜 인간에게 이런 메마른 시기를 허용하는 걸까?
그것은 원수가 인간을 단순한 꼭두각시나
자기에게 복종하는 노예로 만들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일시적인 감정이나
수동적인 보상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서기를 원한다.
원수는 인간 발등을 붙들고 있던 손을 어느순간 살짝 떼고,
인간이 스스로 걷는 법을 배우게 하지.
어린아이로 머무르지 않고
성숙해가는 어른으로 자라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육체의 본능적인 감정에
요동치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에 머무르게 하지 않아.
감정이 뜨거울 때 순종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거든.
하지만 열정의 느낌도 없고,
고통에 찬 목소리로 기도를 하지만
신이 침묵할 때...
신의 존재조차 의심스러워하고
신에게 버림받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이렇게 캄캄한 골짜기를
홀로 힘겹게 건너고 있다고 생각될 지라도
인간이
자신이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것이 ‘그래야 하기 때문에’
다시 신에게 손을 내밀고 무릎을 꿇는 것.
그것이 원수가 인간에게 바라는 모습이란다.
누군가는 이 꼴사나운 모습을 신을 닮은 인간의 모습,
‘거룩함’ 이라고 한다지?
사방이 가로막힌 것 같고 원수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는 여전히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속삭이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지옥의 어떤 불길보다 강력하다.
(쉿! 이건 비밀이란다.) 이 때 우리들은
인간에게 손을 뻗을 수 없고 지옥에 데려올 힘을 급격히 잃게 되지
웜우드,
너는 그가 메마른 상태에 있을 때
온갖 체념과 냉소 혹은 쾌락으로 그를 유혹하려 하겠지.
하지만 기억해라.
그가 골짜기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원수를 향해 마음의 손과 발을 뻗기라도 한다치면
우리가 내내 쌓아온 공든 탑은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우리는 감정을 다루는 데 능숙하지만,
어린아이 같던 인간이
어느 날 원수가 바라던 품성으로 자라고
변화한 ‘거룩한 의지'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란다.
그러니
머리나쁜 네 녀석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다시 한번 강조하마
네 환자가 지금 겪고 있는 그 '메마름'을
절대 우리의 승리로 착각하지 마.
오히려 그가 진짜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위험한 신호일 수 있으니까.
너는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방해해야 한다.
‘뜨거운 열정’이 식고,
단단하게 뿌리내리는 ‘신뢰’ 라는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것인데도,
이제 상대방의 사랑이 차갑게 식어버렸고
버림받게 되었다고 믿게 만들어 버려라.
인간의 본성은 변덕스럽지만,
그 변덕스러운 동물적인 본성을 뚫고 나오는 의지의 힘은 무섭다.
네가 맡은 그 환자가 골짜기 끝에서
원수에게 다시 손을 내밀지 않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라.
만약 그가 이 골짜기를 무사히 통과한다면,
우리는 영영 그를 잃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네가 유혹하고 있는 인간 환자 대신 누군가가
지옥에서 뜨거운 맛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누군가가 네가 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너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삼촌 스크루테이프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