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인간의 '오늘'을 훔쳐라

- 공상의 바다에 빠뜨려 허우적대게 해

by 거북이

사랑하는 나의 조카 웜우드에게.


환자가 전쟁 때문에 징집당할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치 않다는 소식,

아주 기쁘게 들었다.

우리로서 환자 상태가 불확실 할수록 좋지.

환자의 마음이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희망이나 두려움으로 혼돈스러워 질테니까.


암, ‘불안과 두려움’만큼 효과적인 게 없지.


네 임무를 알려주마.

환자가 현재의 불안과 두려움을

인내하며 감당하지 못하게 해.


지금 느끼는 두려움은

마치 즉을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잘못된 것’ ‘고쳐야 할 것’ 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거다.


두려움이 일어날 때

그 두려움이 한낱 ‘심리상태’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대 눈치채지 못하게 해


예를 들어

환자가 심한 모욕감을 느꼈을 때

‘나는 지금 분노라고 부르는 상태에 들어서고 있다’ 라거나

젊은 여자의 짧은 치마에 눈길이 자꾸 갈 때

‘나는 지금 정욕을 느끼고 있다’ 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게 해.

자각하는 바로 그 때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인간들이 절대 알아 채지 못하게 하라고.


반대로

‘나는 점점 자비로워지고 있어’ 라거나

‘나는 겸손해 지고 있어’ 라는 마음이 일 때는

즉시 알아채게 하고 자기 내면에 집중하게 하는 거지.

자기 내면에 집중할 때 현실의 이웃들이 보이지 않거든.


보아라, 엘리아스가 벌써 덫에 걸려들었구나.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이미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걱정들 속을 헤매고 있다.

그의 눈앞에 놓인 갓 구운 따뜻한 빵은 목구멍에서 부드럽게 넘어가지 못하고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자신을 질책하고 무시하는 소음으로 들릴 것이다.


이렇게 영혼을 현재와 현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핵심이다.

오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차

그는 오늘 마시는 시원한 물 한 잔, 창가에 비치는 따스한 햇살을 느끼지 못한다.

‘현재, 지금 이순간’ 이라는 보석을 미래라는 쓰레기통에 스스로 던져넣고 있지.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 세계를 보지 못하고

공상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다음은 '사랑'에 대한 교묘한 뒤틀림이다.

인간들에게 '인류애'라는 거창한 단어를 가르쳐라.

멀리 떨어진 이국땅의 굶주리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눈물을 흘리게 하고,

지구 반대편의 환경 문제를 걱정하며 고결한 선의를 베푸는 상상을 하게 만들어라.

추상적인 사랑은 아주 쉽고 달콤한 마약과 같지.


하지만 웜우드야, 우리의 멋진 기술은 여기서부터가 진짜다.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쏟는 그 가짜 선의의 양만큼,

바로 옆에 있는 이웃에게는 냉소와 체념, 분노를 품게 해라.

매일 마주치는 가족의 사소한 습관에 치를 떨게 하고,

이웃의 작은 실수를 비난하게 만들어라.

가까운 사람을 미워하면서 먼 곳을 사랑하는 모순,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파멸시키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지.


엘리아스를 보거라.

그는 지금 인터넷 게시판에 평화와 박애를 주장하는 글을 쓰면서,

방금 자기 방 문을 두드린 친구에게는 짜증 섞인 소리를 내뱉고 있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이냐!

그의 마음속에서는 '나는 평화와 박애를 사랑하는 선한 사람이다'라는 착각과

실제의 짜증섞인 행동이 충돌하며 기괴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내고 있지.


이처럼 인간이 자기 심리상태를 자각하지 못하고

현실이 아닌 공상속에서만 살아갈 때

그의 영혼은 겉은 번지르르하겠지만 더욱 먹음직스럽게 썩어갈 것이다

그는 자신이 자비롭고 정의롭다고 믿기에 더욱 잔인해질 수 있고,

미래를 걱정하기에 현재 해야 할 일과 의무들을 저버릴 핑계를 얻게 될 것이다.


자, 웜우드야,

이제 네가 할 일은 명확하다.

그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려 할 때마다 미래의 불안을 주입하고,

그가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려 할 때마다 그 이웃의 단점을 속삭여라.

그를 실제가 아닌 거대한 '공상'의 바다에 빠뜨려 버려,

눈앞의 명쾌한 진실들을 보지 못하게 차단하는 거다.


인간은 스스로가 모순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할 때

가장 완벽하게 우리 수중에 들어올 것이다.

인간 환자의 오늘을 훔치고,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어라.

계속해서 지금처럼 냉소하게 하고, 체념하게 해


그러면 그는 자기가 스스로 판 무덤 속에서

영원히 고독한 선구자 행세를 하며 썩어갈 것이다.

지옥에서 너의 성과를 기다리마.


너를 아끼는 삼촌, 스크루테이프가.


공상속에서 살기.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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