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조카 웜우드에게.
유럽에서 또 전쟁이 시작되었다지?
네가 ‘기뻐서 미치겠어요’ 라고 말하며
춤을 추고 있다는 소식에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구나.
피 냄새와 비명 소리에 도취되어 우리의 본질을 잊지 마라.
우리의 목표는 포도주 한 모금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마시고 싶을 때마다 마실 수 있는 것이다.
환자들이 불안에 떨며 고뇌하는 것을 보는 것이 무척 즐겁지만,
그의 영혼을 '심연'으로 끌고 오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야.
전쟁은 양날의 검과 같다.
공포는 인간을 우리에게 가깝게 만들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을 '원수'에게 매달리게 만들기도 하지.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인간들은 평소에 잊고 살던 '영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흥청망청 시간을 허비하던 인간들이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면
짧다면 짧은 인간의 삶속에서
‘영원’과 ‘어떻게 사는 것이 더 가치있는 삶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지.
전쟁이 죽음을 환기시킨다는 점이 우리에게 전적으로 불리하다!
원수 편에 있는 인간들은
그야말로 완전한 채비를 갖추고 죽음을 맞이하는 셈이지.
그렇게 되면 그 동안 우리들이 애써 환자들의 마음속에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지 뭐’ 라며
‘세속에 만족하게 하는 마음’을 열심히 불어넣고 있었던 노력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총소리와 폭탄이 터지는 전쟁터에서 네 환자가 죽음의 공포에 질려
단순히 비명을 지르게 두지 마라. 그 공포를 '원망'으로 바꾸어라.
네 환자 아리스가 전장에서 겪는 고난을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으로만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동료의 죽음을 목격할 때마다 그에게 속삭여라.
"네가 믿는 그 선한 신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말이다.
고난 그 자체보다,
고난 속에서 느끼는 '고립감'과 '배신감'이 영혼을 썩어가게 하지.
웜우드, 너는 지금 아리스가 용기를 내지 못하게 겁쟁이로 만들려 하더구나.
하지만 조심해라.
지나친 비겁함은 오히려 그에게 수치심을 주어 회개로 이끌 수 있다.
차라리 그에게 '증오'를 가르쳐라.
적군을 인간이 아닌 악마로 보게 만들고,
그들을 죽이는 행위에서 잔인한 쾌락을 느끼게 유도해라.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증오만큼 영혼을 빠르게 갉아먹는 것은 없다.
특히 전우인 '루시안'과의 관계를 이용해라.
루시안이 아리스보다 더 안전한 보직을 맡거나,
더 많은 배급을 받는 순간을 놓치지 마라.
전쟁터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질투와 시기심은 평화로운 때의 거대한 탐욕보다 훨씬 강력하다.
"왜 나만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게 해.
인간들이 미래에 대해 걱정하게 만드는 것도 잊지 마라.
현재의 고통은 견딜 수 있어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미래의 불행'은 환자의 목을 옥죌 것이다.
아리스가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을 떠올릴 때,
따뜻한 추억이 아니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과
'홀로 남겨질 가족들에 대한 과도한 불안'에 빠지게 해라.
불안은 기도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장벽이다.
만약 아리스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다면,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병상에 누워 있는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며 자기연민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가 자신의 상처를 ‘영광스러운 훈장’이 아닌
'세상에 대한 원한'으로 여기게 계속 유도해.
육체의 불구가 영혼의 불구로 이어지도록, 그의 냉소주의를 부추겨라.
자기를 전쟁터로 보낸 세상과 인간에 대해
실컷 원망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게 해.
"결국 남는 것은 상처뿐이다"라는 생각만이 남도록 해.
'원수'는 전쟁의 고통을 통해 인간들이 한층 더 성장하고 배우길 바라지.
그리고 이걸 아는 원수편에 선 작자들에게
고난이 인간의 삶에 자양분이 된다는 것도
원수에게 들어 똑똑히 알고 있거든.
우리는 그런 인간들이 고난을 통해
성숙해 질 수 있다는 믿음을 철저히 방해해야 한다.
아리스가 다른 사람을 돕고 싶어 할 때마다,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위험한 짓인지 상기시켜라.
"너 하나 살기도 바쁜 세상이야"라든가
혹은 “니 까짓게 뭘 도울 수 있다는 거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목소리로
그의 양심을 비틀고 잠재워라.
자, 이제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아리스는 전쟁터에서 자신이 살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거나
반대로 타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시켜야 하는 순간을 맞이할 테지.
영혼의 갈림길에 서게 될 것이다.
그 때 그가 비겁하게 숨거나, 동료를 배신하고 살아남는 길을 택하게 해.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은
그를 심연의 지옥으로 잡아채 끌어당길 수 있는
끈적한 그물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나 항상 유의해야 할 거야.
나의 오랜 경험에 비춰 볼 때
인간이 원수에게 요청하는 기도를 하기만 해도
그는 거의 언제나 보호받게 되어 있거든.
너를 아끼는 삼촌, 스크루테이프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