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제르 Aug 30. 2023

자기 통제감의 상실

내 안에 모든 '적당했던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첫 글에서 큰돈을 들이지 않고 지속 가능한 리추얼(ritual)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소개하겠다고 했어요. 먼저 리추얼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봤는데요. 1. (특히 종교상의) 의식 절차, (제의적) 의례 2. (항상 규칙적으로 행하는) 의식과 같은 [의례적인] 일 3. 의식상의, 의식을 위한 4. (단순히) 의례적인, 이라고 합니다(출처: 네이버 어학사전). 저는 종교 지도자는 아니니까 두 번째 정의에서의 리추얼이라는 말을 쓸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규칙적'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얼마나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편인가요? 사실 저는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그렇게 성실한 편은 아니었어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어요. 일찍 일어나야 하는 날이면 알람을 1분 단위로 대여섯 번은 울리게 해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어요. 천성이 게을러서 일정이 없는 날이면 하루종일 침대와 한 몸이 되어 누워 있으면서도 '격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를 되뇌곤 했고요.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이동할 때면 최소시간이 아닌 최소환승을 고집해서 한 시간이면 갈 거리를 한 시간 반씩 빙 둘러 다니던 굳이 쳐주자면 창밖 볼 줄 아는 여유를 가진, 낭만 좀 즐길 줄 아는 그런 20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차곡차곡 쌓아 오던 느긋하고 게으른 일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사건이 있었어요. 첫 아이의 출산이었죠. 제 손길 없이는 제 얼굴에 묻은 머리카락 하나 못 치워 버둥거리는 생명체를 맞닥뜨리게 된 것이었어요. 순하다면 순했지만 제 아무리 순한 아이라도 스스로 분유를 태울 줄 몰랐고 젖병을 닦을 줄 몰랐어요. 배앓이도 변비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기저귀를 채울 줄 아는 것도 아니었지요. 잘 자는 편이었지만 졸리다고 해서 스스로 아기 침대로 걸어 들어가 코 잠들 줄은 몰랐어요. 그 어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지독하게 안 먹긴 했지만 아무튼 대체로 순한 기질의 아기였어요. 그런데도 모든 순간에서 어른의 손길을 필요로 했고 그 어른은 제가 되었고요. 


  나는 이 아이의 손아귀에 달려 있구나. 결혼 전 몸이 아플 땐 이불을 폭 뒤집어쓰고 땀을 내며 온종일 합리화된 농땡이를 부릴 수 있었는데 이젠 마음 놓고 아플 수도 없구나, 싶었어요. 매해 초가을이면 찾아와 엄마의 걱정과 보살핌을 듬뿍 받을 수 있었던 환절기 감기도 어린것의 눈치를 보느라 앓지도 못했지요. 


  게을렀던 시절에 대한 벌을 받는 기분이었어요. 한 순간도 노동자의 안위를 고려해 주지도 배려해주지도 않는 아기 사용자를 보면 좋은 순간만큼이나 힘든 때도 많았지요. 제 안에 있던 모든 '적당했던 것'들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잠과 체력, 영양분과 면역력, 인내심, 자신감...... 주말이면 남편과 다니던 빵지순례도, 감성 카페 도장 깨기도, 친구들과의 만남도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돌봄 노동자가 되는 그 순간부터 '도전 과제'가 되었어요. 병원 검진이나 은행 업무 같은 것들도 다른 누군가에게 며칠 전부터 아이를 봐달라고 도움을 요청해 놓지 않으면 못하는 일이 되었어요. 다른 누군가는 자연스레 저의 부모님이나 친정 동생이 되었고요. 


  아이는 가만히 누워 있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수고가 필요했어요. 제아무리 순한 기질의 아이라도요. 매일 아침 예민하고 어려운 기질의 아이와 마주하는 돌봄 노동자들은 얼마나 더 힘이 들까요. 온종일 아이의 부름에 응답하고 필요를 채워주며 이곳저곳 도움의 손길을 뻗을 때마다 제 안에 있던 통제감이 사라져 가는 걸 느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집 근처에 작고 수수한 마카롱 가게가 하나 생겼습니다.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타인을 돌보면서도 나를 키우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