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바라온 물 밖으로
"제가 그동안 심연 속에서 20년을 살아왔거든요. 이런 저한테 더 이상 좌절, 갈등, 실패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 일들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다만 부딪혀 보는 거랑 시도도 하지 않는 거랑은 차이가 있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부딪혀 보려고 해요. 예전엔 없던 깡다구랄까, 자신감이 생겼거든요. 한번 물 위로 올라와 보니 앞으로도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올라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요, 심연 속에만 있다가 그토록 바라던 물 밖으로 올라왔는데 막상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너무 평화로워서 우울하더라고요. 마치 전쟁터에서 오랫동안 전투하다 전쟁이 끝나 일상으로 돌아온 군인 같달까요. 전쟁터에서 느껴졌던 강렬한 자극들에 익숙해져서인지 정작 일상에서는 뭘 하며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선생님, 이제 제가 어떻게 모험할지 길을 알려 주세요. 아니, 길이나 답을 알려줄 순 없다면 방법을 알려주세요."
나의 내담자는 심리상담을 통해 오랜 시간 겪어온 우울감에서 벗어났다. 완전한 극복이라고는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어쨌든 현재는 만성적이었던 우울감에서 벗어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앞으로는 자신이 뭘 해야 할지를 물었다.
물속에서는 잠수를 하면 됐다. 숨을 참고. 죽을 만큼 힘들지만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버티면 되었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제 물 밖으로 올라온 그는 다시 가라앉지 않기 위해 쉬지 않고 헤엄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유형도 해야 하고 접영도 해야 하고 어쩔 땐 개헤엄이 필요할 때도 있다. 이제는 잠수만 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수영 방법을 익혀서 물에 뜬 채로 목적지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는 강 건너로의 모험을 시작하려 한다. 그리고 이제 그 방법을 배워야 한다.
바로 이 단계에서 필요한 것이 인지학습치료라고 생각한다. 물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물 밖의 목적지를 함께 정하고 써본 적 없던 근육을 움직여 목적지에 효과적으로 도달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바로 치료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읽어본 적 없는 글을 읽게 하고 행간의 의미를 이해하게 하고 사회적 맥락 속에서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근육을 잘 쓰는 법을 알려주는 일은 인지학습치료의 목적인 인지기능을 높여주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양한 인지적 기술을 증진시켜 줌으로써 더 잘 살게 하는 것이다.
내담자마다 인지학습치료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다를 것이다. 인지 수준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대개 나이에 따라 처한 상황이 다르니까) 이루고자 하는 바도 다르기 때문이다. 나의 내담자들만 하더라도 그렇다.
중학생 A는 평소 수업 태도에 대한 지적을 받는 것이 고민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는 '부적절한 수업 태도'로 비교적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풀배터리 심리검사와 상담을 통해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면 분명 감정적인 어려움이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어머니나 친구들, 동생 등 가까운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분노를 조절하는 방법을 기르고 시간관리 등의 자기관리기술을 향상시키는 것이 1차적 목표이다.
20대 중반의 B는 처음 자격증 취득을 목표로 공부라는 것을 해보려 하는데 이제껏 공부를 해본 적이 없어 불안하다. 읽으면서도 이해하기 어렵고 외우면서도 잊을까 두렵다. 공부에 어느 정도의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지도 감을 잡을 수 없다. 공부한다고 오랜 시간 앉아 있었더니 목이나 어깨 통증도 심하다. 공부하는 데 이렇게나 많은 힘이 들어가는지도 의문이다.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공부에 대한 신념 자체가 어린아이의 수준과 같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다 보면 공부에 대한 신념이나 자신만의 방식이 어느 정도 생겨날 텐데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 그럴 기회를 빼앗겼다고 한다.
B와는 공부에 대한 잘못된 신념을 바로 잡는 작업을 했다. 일단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B가 치를 시험의 유형과 특성을 분석했다. 학습 목표를 세우고 세부적인 학습 기술들을 향상할 수 있는 훈련을 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해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관심에 따라 책을 선정하여 책 읽고 필사하는 과제를 내주었다. 꽤 어려운 책인데 두 달이 지나니 글을 읽는 속도가 빨라지고 마음에 와닿는 글귀가 생길 정도로 이해력도 좋아졌다.
20대 초반의 C는 지능이 낮은 수준이다. 재활센터에서 하는 업무는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그러나 집과 재활센터를 나서는 순간 그에게는 흐트러진 퍼즐 조각처럼 복잡한 현실이 마주하고 있다. 기본적인 글 읽기나 지하철 타기는 가능하지만, 식당에 들어가 먹고 싶은 메뉴를 주문할 수 없다. 아침에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는 한두 시간이 남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그에게는 '복잡한 퀘스트 깨기'이다. 잊지 않고 챙기는 게 어렵고 필요한 것을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이 어렵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하고 정리해서 말하기 기술이다. 따라서 일상 속에 마주하는 상황들(그에게는 복잡하게 느껴지는 수많은)을 함께 정리해 보고 상황에 맞게 말하고 표현하는 연습을 했다.
이처럼 인지학습치료의 대상과 동기는 저마다 다르다. 생각하는 세부적인 목적지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치료의 목표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돕는 것'이라는 점에서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치료사로서 어느 직업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더 성장해야 한다는 거룩한 부담감이 있다. 내담자보다 많은 책을 읽어야 하고 더 많은 글을 써야 한다. 허송세월하지 않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야 하며 더 나은 삶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요즘 주변에서 "너 요즘 뭐 하는 거야?"라고 물으면 "그냥, 공부해."라고 답하는 것도 그 이유였다. 아직 치료라고 하기엔 어설프고 공부라면 공부랄 수 있는 분야이므로.
천성이 게으른 나에게는 매일이 도전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며 스스로 위안 삼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누군가 인지학습치료에 대해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물 밖으로 나왔을 때, 혼자 헤엄치기를 시작해야 할 때, 같이 헤엄쳐 건너편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일단 물 밖으로 나온 그대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앞으로 잘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