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얘기를 못해 그렇게 애틋해? 진짜 궁금해서 그래 얘기 좀 해줘봐아아
심심하니까 회피형 남자친구 괴롭히는 연애썰이나 풀어보자.
나는 조금만 긴장을 풀면 기분이 표정과 말씨에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다. 어떤 때는 단점이 되지만, 대학로에 연극을 보러 가면 나는 리액션이 끝내주는 관객이 된다. 워낙 공연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한데, 예랑이를 만나기 전에는 돈 쓰는 게 싫어서 연극이고 뮤지컬이고 일부러 찾아본 적도 없었다. 언젠가 "연극 볼까?"하는 제안에 강형욱소장의 '산책갈까' asmr을 들은 강아지마냥 반박자도 안 쉬고 오케이를 외쳤더니 그 이후로도 예랑이가 간간이 연극이나 뮤지컬 데이트를 계획해주곤 한다.
하루는 예랑이랑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내용의 로맨틱 코미디 연극을 봤다. 신나게 웃으면서 보고 나서 높아진 텐션을 잠재우지 못한 채로 우리는 다음 데이트 장소로 향했다.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상관 없다. 예랑이가 가는 길에 높은 건물 하나를 발견하곤 무심코 말했다.
"저기가 나 예전에 다니던 학원이야."
예전에 다니던 학원? 그 말을 듣자마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 오빠 첫사랑 만났다던 데 아니야?"
"엇, 어...? 아니 그건 재수할 때고,"
"아 맞다! 그건 안양이라고 그랬지. 그럼 여기는 전여친 만났던 곳이네!"
너무 놀라서 순간적으로 빼도 박도 못하는 말뚝 머리에다가 풀스윙으로 망치질을 한 번 더 해버린 예랑이를 내가 활짝 웃는 얼굴로 몰아세웠다.
"그걸 기억했어...?"
망연한 말투와 표정이 로맨틱코미디 연극보다도 더 우스워서 길바닥에서 깔깔거리고 웃었던 기억이다.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예랑이가 내게 존재만 인정하고 기타 구체적인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밝힌 바가 없는 과거의 그녀들(?)은 총 3명이다. 연애 극초반, 감성이 흘러 넘치는 전화통화를 하던 중 예랑이가 그만 정보를 흘렸고, 내가 그걸 몽땅 기억해버린 것이다. 물론 내가 그런 정보들을 기억하는 목적은 오직 하나, 이런 순간이 왔을 때 놓치지 않고 예랑이를 놀려주기 위해서다.
햇수로 8년을 연애를 하지 않고 보낸 나는 중학생 때 사귄 남자친구 하나, 대학 때 딱 한 달을 주 1회 겨우 만나며 교제한 남자친구 하나가 역사의 전부다. 예랑이는 '자기만 일방적으로 얻어 맞는 구조'라고 표현한다.
지금도 예랑이한테 짓궂은 장난을 치고 싶어질 때면 첫사랑 얘기를 해달라고 한다. 실제로 궁금하기도 한데, 예랑이는 무슨 애 셋을 낳기 전까진 날개옷을 줄 수 없는 나무꾼마냥 10주년이 될 때까지 절대 말 안할 거라고 고집을 부린다. 그래도 내가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며 애원하면 편두통이 도진 사람같은 표정을 짓다가, '때는 2022년 1월...'로 문장을 시작한다. 2022년 1월은 우리가 소개팅을 하고 처음 만난 시기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이렇게 머리 아픈 글을 쓰고 있는 줄도 모르고 예랑이가 카톡을 보내고 있다.
예랑이는 천사의 계시를 받들라. 첫사랑 얘기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