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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믕됴 Oct 25. 2023

유일한 예외


내가 어렸을 때,

아빠가 허공에다 대고 욕을 하며 우는 모습을 봤어.

다 찢어진 가슴을 이어 붙이려 애쓰고 있는 모습을.


엄마는 이 일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어디 두고 보라고 맹세했어.


그 날이 내가 절대 사랑을 노래하지 않기로 결심한 날이야.

그런 게 존재하지도 않는다면 말이야.






 내 얘기인 것만 같은 노래가 있다. 엄밀하게 따지고 들면 내 얘기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그리 많지 않은데도 말이다. 파멸로 치닫는 다른 여러 사랑 이야기들의 클리셰적 레퍼토리와 달리, 내 부모님의 불행은 피차의 잘못이 아닌 한 쪽의 일방적인 과실의 누적이 그 원인이 됐다. 나는 그 원인을 제공한 쪽을 아주 오랫동안 미워하고 멸시하며 성장했다. 그러는 중에 다른 한 쪽이 묵묵히 그저 곁을 지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불쌍히 여기기도, 바보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자라는 중에는 그 무기력이 이해되지 않아 혼란스러웠지만, 지금은 꺾이지도 휘어지지도 않고 폭풍 한가운데 울타리로서 서 있는 것을, 단지 정지해있다는 이유만으로 무기력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아마도 버티던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집에 물이 샌다고 집을 버리면 비를 다 맞는다. 내새끼들이 비 맞고 감기 들 바에야 나 혼자 젖고 말겠다.


 나는 언제나 내가 버티던 사람을 닮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처럼 세심한 성격도 아닌데다 인내심도 부족하고 그만한 강단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당연히 그 반대쪽을 닮았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말이 되니까. 어쩌면 그래서 그렇게 미웠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완전히 다른 점도 있었다. 그 사람은 노래를 정말 지지리도 못하고, 나는 사랑 노래를 즐겨 부른다.


 물론 내가 사랑 노래를 자주 부르는 건, 그저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세상에 사랑 노래 밖에 없어서다. 하지만 본 적 없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아서, 노래를 얼마나 좋아하든 남녀간의 사랑을 믿어본 적이 없었다. 공포영화와 귀신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귀신을 믿지는 않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내가 본 적이 없다고 있는 것이 없던 일이 되진 않는다. 내가 도저히 부정하고 외면할 수 없도록 정면으로 부딪히게 되어버린 다음에는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그런게 정말로 있다는 걸 알게 된 다음부터는 그 많은 사랑 노래가 처음과 다르게 들린다. 노래 뿐이랴. 온 세상과 내 생각의 전체가 처음과 달라진다. 고작 사람 하나 때문에.


 네가 나의 유일한 예외라고, 마치 스스로를 설득하듯이 몇 번이고 되뇌이는 노래의 가사는 '그리고, 나는 너를 믿으려는 중이야.'로 끝이 난다. '믿는다'도 아니고, '믿는 중이다'도 아니고, '믿으려는 중이다'라니. 노래가 끝나도 아무 것도 끝나지 않는다. 아니, 시작은 한 것인지도 의문스러울만큼 느려터진 노래다. 유일한 예외를 찾았으면 바짓자락을 잡고 매달려도 될텐데 답답하기도 하다.


 이 글은 그 노래를 닮아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예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속 터지지만 나에게만은 희망적인 노래처럼, 나도 나의 유일한 예외를 믿는 중이다. 노래보다는 살짝 진도가 더 나간 셈이다.


the only exception- para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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