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최장 연애 기간 매일 갱신 중
오늘은 우리가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한지 500일 째가 되는 날이다. 장거리 연애 중이라 굳이 억지로 만나지도 않았고, 특별히 선물을 주고 받은 것도 아니고, 그냥 메신저로 조금 더 달달하게 꽁냥거린 게 전부인데도 아주 만족스럽다. 100일마다 돌아오는 기념일은 내 기준에 정말 무서울 정도로 잦기 때문에 매번 제대로 챙기려 들면 기념일에 쫓기는 기분이 들 것이다. 매년 처음 사귀기로 한 날을 기념일로 축하하는 정도면 기분이 날 것 같기도 한데, 분기마다 돌아오는 건 업무처럼 느껴진다.
나는 지금의 예랑이를 만나기 전까지 내가 기념일을 귀찮아서 싫어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100일에 예랑이 줄 선물을 열심히 고르면서 알게 됐다. 애도 아니고 기념일 따위를 왜 챙기느냐며 하찮게 여겨서 기념일을 싫어하는게 아니라, 기념일에 너무 진심이라서 싫어하는 거였다. 귀찮으면 구색이나 맞출 수 있는 무언가를 대충 사면 될텐데, 내가 그러질 않더라. 예랑이한테 필요한 물건이면서도 평소에 잘 들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잘 어울리는데다 예랑이 취향에 딱 맞는 무언가를 찾으려고 아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달려들었다.
별로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기념일을 받는 날이 아니라 주는 날이라 생각하면 그 날이 부담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애인한테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는게 그리 서럽진 않다. 애인을 안 만든 게 나 자신이니까. 생각을 고쳐먹고 기념일을 받는 날이라고 인식하고 싶지도 않다. 애초에 이 관계를 만들어가면서 알아차린 내 본성을 생각해볼 때, 그게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기념일에 내가 주고만 사는 건 아니다. 예랑이가 지금껏 나에게 선물한 크고 작은 선물들이 세어보면 벌써 꽤 많다. 문제는 그 모든 선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이게 왜 문제냐면, 나는 이와 상응하거나 이보다 나은 선물을 주지 못하면 찜찜해서 죽어버릴 지도 모르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예랑이가 준 선물 중에 가장 마음에 들고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 하나 있는데, 그걸 어쩌다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 때 그거 찾겠다고 날 어둡도록 내가 왔던 길을 죄다 되짚어 돌아가고, 결국 그 날 못 찾아서 다음 날과 그 다음 날까지도 마음 졸이며 동네를 헤메고 다녔다. 두 번 정도 울기도 했다. 내가 이 정도로 그 선물들을 좋아하며 아끼는데, 그 정도의 물건을 고르는게 가능하겠냐는 생각이다.
하긴, 내가 그렇게까지 애태우고 찾아다닌 건 잃어버린 물건 자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제 어두워져서 잘 봬지도 않는 길을 헤매고 다니며 한숨만 푹푹 내쉬다가 결국 눈물까지 터졌던 건, 내 소중한 사람이 내게 직접 건넨, 나를 향한 진심의 구체화된 증거를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그런 증거가 없어도 빤히 보이는 마음이 그땐 확신하기가 어려웠던 것도 한 몫 했을 것이고.
그러니 예랑이한테 이제 몇 백일 짜리 기념일은 그만 챙기고, 몇 주년 기념일만 챙기자고 하는 수 밖에 없다. 우리가 100일을 더 사랑하는 건 당연한 일일 뿐이고 더 이상의 증거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내가 전면에 내세울 명분이다. 이면의 진심은... 선물 고르는 게 너무 어렵다는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