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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Nov 06. 2023

'앗~ 신발끈' 10km 마라톤을 망쳤다

달린 지 2km를 막 지났을 때였다.

오른쪽 신발이 좀 헐겁다고 느꼈다.

내려다보니 끈이 풀려 날뛰고 있었다.

오늘 달리기는 망했다.

도로 가장자리에서 끈을 재빨리 묶었지만 20~30초는 지나가버린 듯했다.

그래도 어떤 결말이 펼쳐질지 모르니 최선을 다해야 했다.

'헉~헉~ 후~~'

흐트러진 짧은 들숨 2번, 긴 날숨 1번의 호흡을 최대한 가다듬고 한발 한발 리듬을 타려고 했다.


10월 29일 대망의 날이 밝았다.

잠을 푹 잤고 알람 소리에 맞춰 기분 좋게 일어났다.

오늘은 또 어떤 달리기 여정이 펼쳐질까.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 번째 10km 마라톤 대회 참가다 보니 그렇게 긴장되지는 않았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축제를 한번 즐겨보자는 심정이었다.

부산 바다마라톤 집결지 벡스코(BEXCO)

지하철을 타고 집결지인 부산 벡스코(BEXCO)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참가자들이 있었다.

소지품을 맡기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18회째라는 부산 바다마라톤은 올해 가장 많은 8200여명이 참가했다고 했다.

유독 외국인이 많이 보였다.

그 외국인들은 이번 마라톤 대회에서 무엇을 느꼈을지 궁금했다.

실제 이번 대회 남자 10km 부문 2위는 미국인이었다.

아내와 나는 한 달여 전부터 일주일에 5번가량 5km 이상을 뛰면서 이번 대회를 준비해 왔다.

하지만 가장 많이 뛴 게 8km 정도여서 거리에 대한 부담이 약간 있었다.

그럼에도 둘 다 각자의 최고 기록을 세워보자고 의기투합했다.

내 목표는 이전보다 4분 앞당긴 50분대, 아내 목표는 일전에 아쉽게 놓친 1시간 이내였다.


광안리 앞바다를 가로지르는 광안대교를 두 발로 건너는 기분은 색달랐다.

눈을 옆으로 돌리면 햇볕을 받아 반짝거리는 바다가 보였다.

달리기에 너무 좋은 날씨였다.

기념사진이라도 찍고 싶었지만 스마트폰을 맡기고 와서 달리는 데만 집중했다.

광안대교를 건너 삼익비치, 광안리해수욕장, 민락수변공원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이미 주변 지리를 알고 있기에 편안했다.

마라톤 대회에서 사전 코스 답사가 왜 필요한지 알 수 있었다.


역시 후반부 7km를 지나면서 발이 무거워졌다.

가수 윤상의 '달리기' 노래를 떠올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달릴 때마다 힘든 고비가 오면 이 가사는 힘을 내게 해줬다.

그래도 힘들어 마지막 1km는 땅만 보며 달렸다.

남은 구간은 온 힘을 다해 스퍼트 하고 싶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결승선을 통과하자 전신에 힘이 빠지며 아무 데나 주저앉았다.

애플워치에 저장된 10km 기록은 47분 59초였다.

믿기지 않았다. 이전 기록보다 무려 7분이나 앞당긴 숫자였다.

근데 곧이어 문자메시지로 전송된 이번 대회 10km 공식 기록은 48분 5초였다.

아... 신발 끈.

아쉬운 48분대. 그래도 내 개인 최고 기록.

신발 끈만 안 풀어졌어도 47분대 기록이었는데 아쉬웠다.

그래, 이것도 대회의 일부분이었다.

인생처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고 최선을 다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이전보다 6분여를 당겼으니 이 또한 좋은 기록이었다.

잠시 결승선 주변에 앉아 있다가 아내 마중을 나갔는데 아내 역시 표정이 밝았다.

무려 10km 두 번째 공식기록이 이전보다 6분이나 앞당긴 54분 2초였다.

조금만 더 빨리 뛰었으면 53분 대도 기록할 수 있었다며 웃었다.

여성 참가자 1589명 중 77번째로 상위 5% 정도의 기록이었다. 대단했다.

아내는 이날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고 싱글벙글이었다.

달리기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사람을 이렇게 들었나 놨다 하는 건지 궁금했다.

결승선에서 우연히 지인을 2명이나 만나 인사했다.

같이 10km를 같이 뛰었다는 동질감, 동료 의식 때문인지 더 반가웠다.

그 지인과 조만간 식사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조금 당기긴 했지만 남은 하루를 기분 좋게 보낼 수 있었다.

달리기는 힘들어도 뛰고 난 뒤 기분이 좋았다.

특히 대회만이 주는 특유의 설렘, 성취감이 매력적이었다.

다음엔 하프 마라톤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아내의 10km PB 54분 2초 인증샷

같은 날 춘천마라톤(일명 춘마) 대회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마라톤 대회 중 하나라는데 실제 춘천에서 열린 건 1990년대 초반이라고 한다.

이날 춘마 동영상을 검색해 보다가 딱 꽂힌 말이 있었다.

한 춘천 태생 남성이 춘마에 참가하며 했던 말이었다.

어릴 적부터 어른들이 춘마를 달리는 걸 보고 자랐는데 그땐 별생각 없이 살다가 막상 어른이 되고 나니 왠지 모르게 춘마에 참여하고 싶었다고.

고향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은연중 대회 참가를 꿈꾸며 언젠간 그걸 이루려고 하지 않았을까.

전통의 마라톤대회가 있는 곳에서 자라는 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뒤늦게 알고 보니 우리나라엔 지역별로 정말 많은 마라톤대회가 있었다.

하지만 지역 전체가 축제로 변하는 마라톤 대회는 손에 꼽을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축제인 마라톤 대회와 그렇지 않은 마라톤 대회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응원하는 사람들의 유무와 규모다.

길가에서 파이팅을 외치는 응원의 목소리들, 그게 러너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는 뛰어본 사람만 안다.

달리기를 좋아하거나 이해하는 사람들이 러너를 향한 순수한 응원이다.

난 스톡홀름에서 두 번의 10km 마라톤을 뛰며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자원봉사자도 아닌 많은 시민이 마라톤 코스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그저 응원했다.

여긴 마라톤에 진심이구나, 달려본 사람만이 달리는 사람의 심정을 알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 순간 그런 축제의 장인 마라톤 대회를 달려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춘마와 함께 스톡홀름 마라톤 대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참여하고 싶다.

스톡홀름 마라톤은 2022년부터 2023년까지 우리 가족이 머물렀던 도시를 달리면서 다시 한번 추억과 풍경을 느껴보고 싶다.

보스턴 마라톤은 정말 마라톤에 진심인 도시여서 재미있게 달려보고 싶어서다.

보스턴 마라톤은 1947년 서윤복 선수가 우승했고 1950년엔 우리 선수가 1,2,3위를 휩쓸어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은 대회다.

특히 보스턴 마라톤은 국내 특정 대회에서 연령대에 맞는 기준 기록을 얻어야만 참가 자격이 주어져 쉽지 않다.

그럼에도 마라톤 축제를 한번 즐겨보고 싶다는 버킷리스트 하나가 생겼다.

잊지 않고 노력하다 보면 언젠간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보스턴 마라톤 참가자격 기준 기록. (사진=보스턴마라톤 공식 홈페이지)

더불어 대회 참가도 중요하지만 부상 없이 오래도록 달리고 싶다.

그러려면 욕심을 좀 덜어내고 즐겁게 달려야 할 것 같다.

절대 무리하지 말기.


또 하나.

여행을 가면 꼭 그 지역을 달려보겠다는 다짐이다.

국내든 외국이든 간에.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그 도시를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인 동시에 예의라고 생각한다.

지난 4월 여행지였던 노을이 진 독일 프랑크푸르트 마인강변길을 달렸을 때 그 느낌과 풍경을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처럼.

달리기로 인한 추억과 행복, 그로 인한 인연이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


달리기는 삶의 변화이자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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