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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Dec 04. 2023

폭설에 길잃은 등굣길, 볼보가 멈춰섰다

지난달(11월) 18일.

자고 일어나 보니 주차된 차 지붕 위에 눈이 쌓여 있었다.

햇볕에 금세 녹긴 했지만 부산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눈이었다.

첫눈.

왠지 모를 설렘이 깃든 단어다.


지난해(2022년) 11월에도 비슷한 시기 첫눈이 왔었다.

부산이 아닌 스웨덴에서였다.

스웨덴에서 맞이한 첫눈이었다.

부산에서 첫눈을 보자 조건반사적으로 스톡홀름의 첫눈이 떠올랐다.


올해도 스톡홀름엔 어김없이 눈이 내린 모양이었다.

눈이 제법 내렸다는 지난 화요일(11월 28일)에는 스톡홀름과 외곽 도시를 연결하는 통근열차가 지연되거나 취소됐다고 했다.

솔렌투나, 나카 등 스톡홀름과 맞닿은 지역 시내버스는 심각한 지연 사태나 노선 운행 중단 사태가 빚어졌다.

스톡홀름 관문인 알란다 공항에서도 항공편 대부분이 지연됐다.

그래도 1년 전만큼 상황이 심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2023년 11월 28일 눈이 온 스톡홀름 풍경. NK백화점 앞 도로인 듯싶다.(사진=Dagens Nyheter)

스웨덴 첫눈 오던 날은 여러 가지 의미로 특별했다.

나에겐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스웨덴에 살면서 처음 경험한 실체적 겨울이기도 했고 그날 겪은 일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메모해 둔 글을 보며 그때를 회상해 본다.


지난해(2022년) 11월 19일 토요일.

정오 무렵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번 겨울 첫눈이었다.

그래 이게 스웨덴이지 하면서 삼남매 모두 마당으로 총출동해 어느새 쌓인 눈밭에서 뒹굴고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면서 놀았다.

일 년에 눈 한번 구경하기 힘든 부산에서 살던 우리 가족은 눈을 보자 추운 줄도 모르고 눈을 즐겼다.

첫눈 그리고 눈사람 만들기... 이때까지만 해도 좋았는데

밤새 눈이 내렸고 일요일인 다음 날 아침에서야 눈이 그쳤다.

현관에 나가보니 30cm는 넘을 만큼 눈이 수북이 쌓였다.

집 주변은 온통 눈세상이었다.

막내가 사랑하는 영화 '겨울왕국'이 이런 모습이겠거니 싶었다

눈이 많이 쌓인 탓에 집 앞 나무가 축 늘어진 모습이 마치 엘사가 만든 '눈괴물' 같았다.

'이게 스웨덴의 겨울 낭만 아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일요일 밤이 되니 약간 걱정이 됐다.

내일 애들 데리고 학교 가야 하는데 별일 없겠지? 별일 없을 거야, 그럼.

일단 잤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하고.

무릎 높이까지 눈 속으로 푹푹 빠지는 학교 가는 길

자고 일어나 집을 나서는데 어제 생각한 것보다 상황이 심각했다.

아이들이 학교 갈 때 집 뒤편 쪽문을 열고 숲 오솔길을 지나 도로로 나가는데 무릎 높이까지 쌓인 눈 속으로 발이 푹푹 빠졌다.

운동화 속으로 차가운 눈이 들어와 발이 젖었고 이내 시렸다.

도로에는 내린 눈이 치워지지 않은 상태였고 주차된 차는 그냥 하얀 눈덩이 같았다.

눈폭탄 맞은 학교 가는 길

출근하려는데 차가 눈에 파묻혀 삽으로 걷어내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 늦겠는데'

가까스로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는데 평소 버스 번호와 도착예정시간을 알려주던 버스정보안내기는 먹통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도로는 차바퀴가 닿는 실선 두 가닥만 검은색이고 나머지는 하얀 눈이었다.

지붕 위에 백설기 올려놓은 듯한 차량

그때였다.

자동차 한 대가 버스정류소 앞에 서더니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자가용 운전자가 뭐라고 말했다.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타라는 손짓 같았다.

이걸 타도 되나 하는 생각에 망설이던 중 옆에 있는 청년이 차로 뛰어들었고 2명이 뒤따라 탔다.

3명 모두 모르는 사이였다.

자동차가 떠나자 후회하는 마음도 잠시, 다음 자동차가 또 섰다.

볼보 XC60이었던 것 같다. 중년의 여성 드라이버가 차에 타라고 했다.

이미 등교시간이 훌쩍 넘어 이번에는 염치 불구하고 첫째, 둘째와 차 속으로 몸을 던졌다.

운전자는 고맙게도 지하철 환승이 가능한 롭스텐(Ropsten) 역까지 우릴 태워줬다.

정말 정말 고마운 마음에 '탁 소 뮈케'만 되풀이하며 내렸다.

롭스텐역에는 우릴 태워줬던 것처럼 고마운 '카풀' 차량들이 계속 도착하고 있었다.

눈으로 엉망이 된 신발로 차 안이 지저분해질 수 있는데도 리딩외(Lidingö) 자가용 운전자들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리딩외에서 스톡홀름으로 나오는 승용차 운전자 대부분은 누가 시키기나 한 것처럼 버스정류소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민들을 환승이 가능한 지하철역까지 실어 날랐다.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스웨덴에서 눈폭탄 맞아 대중교통이 중단된 등굣길에 카풀이라니.. 예상치 못한 호의에 마음이 훈훈해지는 순간이었다.

첫눈에 자발적으로 카풀에 나선 리딩외 자가 운전자들. 롭스텐역에 카풀 차량이 속속 도착하고 있다.

스웨덴에서 살던 곳은 리딩외(Lidingö)라는 곳으로 스톡홀름 북서방향에 있는 섬이다

스톡홀름 자체가 크고 작은 군도로 이뤄진 곳이기도 하다.

리딩외는 스톡홀름 카운티에 속하지만 엄밀히 말해 스톡홀름과는 다른 지자체다.

그래서 스톡홀름 지하철이 연결돼 있지 않다.

스톡홀름 롭스텐역까지만 지하철이 운행하고 버스와 트램으로 갈아탄 뒤 리딩외로 갈 수 있는 교통시스템이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리딩외와 롭스텐을 오가는 버스, 트램 운행이 모두 중단된 것이었다.

그 때문에 리딩외 주민들은 카풀 차량을 얻어 타지 못했다면 꼼짝없이 걸어서 리딩외와 스톡홀름 롭스텐을 잇는 길이 750m 다리를 건너야 했다.

실제로 걸어서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도 많았다.

눈폭탄에 대중교통이 중단된 리딩외 주민들이 다리를 걸어서 스톡홀름으로 나오고 있다

롭스텐에서 지하철을 타고 학교로 가는 중에 '눈이 많이 내려 교통이 불편하니 등교에 주의하고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등교 안 해도 된다'는 학교 알림 문자를 받았다.

조금 일찍 문자를 줬다면 학교 안 갔을 텐데.

첫째, 둘째는 30분 정도 늦었지만 무사히 학교에 도착했다.

학년에 절반 정도는 이날 등교하지 않았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그쳤던 눈이 다시 내렸다.

지하철을 타고 롭스텐역까지 오는 길은 쉬웠는데 여전히 리딩외까지 연결되는 교통수단인 버스와 트램은 운행 중단 상태였다. 트램 레일은 눈 속에 파묻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트램은 오지 않았다(왼쪽), 눈속에 파묻혀 버린 트램 레일(오른쪽)

출발시간이 계속 지연되는 오지 않는 트램을 30여분 기다리다가 결국 리딩외 다리를 걸어가기로 했다.

바닥이 닳은 운동화로 눈길을 걷자니 자꾸 미끄러졌고 무릎마저 시큰거렸다.

다리를 건너 거의 한 시간을 걸어 집까지 도착했는데 불현듯 걱정이 앞섰다.

스웨덴 사람들은 눈이 이렇게 많이 오는데 어떻게 사는 건지, 우리 가족은 앞으로 이 겨울왕국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특히 눈이 많이 와서 버스, 트램이 멈추면 아이들 학교 가는 길이 걱정이었다. 카풀도 하루 이틀이지.

숨 좀 돌리고 나니 이번엔 하굣길이 걱정이었다.

검색해 보니 리딩외뿐 아니라 스톡홀름 곳곳에서도 버스 운행 중단 사태가 속출했다.

지하철은 비교적 상황이 나은 듯했다.

대중교통 마비로 걸어서 아이들 픽업하러 가는 길

역시 불길한 예감은 들어맞아 오후에도 눈은 계속 내렸고 버스, 트램 운행은 재개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걸어서 다리를 건너야 했다.

운동화는 젖은 지 오래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한번 다리를 걸어서 되돌아야 했다.

학교에서 나온 첫째 둘째는 눈길에 장난도 치고 재미있다고 깔깔거리는데 난 앞일이 걱정이었다.

스웨덴이 눈의 나라라더니 한 번 내린 눈에 바로 실감했다.

기상예보를 잘 살피고 방한화나 방한용품을 빨리 사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스웨덴 첫눈이 오렌지 경보라니 (사진=SMHI)

기상청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이번 눈폭탄으로 오렌지 경보가 발령됐다고 했다.

스웨덴의 기상 경보는 옐로, 오렌지, 레드로 나뉜다.

중간 단계인 오렌지 경보는 날씨가 사회에 심각한 결과를, 대중에게 위험을 초래할 수 있고 재산과 환경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수준이다.

또 대중교통 등 사회의 다양한 서비스가 중단될 위험이 크고 취약한 장소에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고 했다.

이보다 강하다는 레드 경보는 어떤 수준인 건지.

첫눈으로 오렌지 경보가 발령됐는데 앞으로의 날씨가, 스웨덴에서의 겨울이 무척 걱정됐다.

그토록 기다려지는 눈이었는데 한번 내린 눈에 눈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눈더미에 내려앉은 나무가 마치 '겨울왕국'의 눈괴물을 연상케 한다

이날 저녁, 옆집 이웃이 귀가하다가 야외 주차장에 쌓인 눈 때문에 자동차 바퀴가 헛돌아 고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이웃 차가 이면도로를 막아 다른 차들도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집 앞 눈을 치우던 나는 눈삽을 들고 나섰다.

강원도 철원 군생활 중 지겹도록 눈 치운 실력을 한번 발휘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바퀴 주변 눈을 한참 걷어내는데 이웃이 '스톡홀름에 20여년 살았는데 이런 눈은 처음 봤다'고 하는 게 아닌가.

이게 스웨덴 보통의 적설량이 아니라 특이한 사례라는 건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고 보니 다음 날에도 현지 주민들도 미처 동계 준비가 안 됐는지 윈터타이어가 없는 차량들이 눈길에 미끄러지는 광경을 자주 봤다.

스웨덴에서는 겨울에 윈터타이어 장착이 필수인 듯했다. 거의 대부분의 차량들이 신발을 갈아신 듯 겨울이 되면 타이어를 바꿔 끼웠다.

심지어 타이어에 철로 된 '징'이 박혀있는 타이어도 봤다.

첫눈 온 지 나흘째 되던 날, 비로소 집 앞 도로에 등장한 제설차량

첫눈의 여파는 꽤 오래갔다.

나흘째 되던 날에서야 제설차가 집 앞 이면도로의 눈을 본격적으로 치우기 시작했다.

곳곳에 쌓인 눈은 날씨에 따라 녹았다가 얼었다가를 반복하며 시꺼멓게 변해 거의 사라질 무렵 다시 새로운 눈이 내렸다.

무지막지한 첫눈에 놀라 서둘러 식구 수대로 스노부츠와 두꺼운 옷도 샀는데 이후 두 달이 지나도록 첫눈에 상당히 못 미치는 눈이 고작 몇 번 왔을 뿐이었다.

첫눈에 무서워 하던 마음과 달리 눈이 펑펑 내렸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내린 기록적 폭설에 스톡홀름 시는 상당히 당황하고 곤혹스러웠던 것 같다.

스톡홀름 남부에는 최대 60cm 넘는 눈이 쌓였다.

당국은 폭설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 시민 비판도 빗발쳤다.

스톡홀름 시 교통국은 제설작업을 외부 업체인 Svevia와 Peab에 맡겼는데 제설작업이 제때 이뤄지지 않자 각각 280만크로나(3억5000여만원)와 55000크로나(688만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Peab는 계약금액 중 120만 크로나(약 1억5000만원)를 깎이기도 했다.

눈과 친숙한 스웨덴 스톡홀름 시가 제설작업을 외주화 하고 벌금까지 물리는 것이 신기했다.

올해는 달라졌을까 생각해 봐도 눈이 단시간에 많이 오면 속수무책이 아닐까 싶다.


스웨덴 첫눈에 대중교통이 끊기고 제설작업조차 엄두를 내지 못할 때 스웨덴 시민이 보여준 자발적 카풀은 1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가슴 뭉클한 장면이었다.


(## 스웨덴 언론 Dagens Nyheter를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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