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추가입학, 그리고 자퇴의 결심

뒤틀린 시작을 지나, 교복을 입기까지

by 엉뚱혀니

6살, 가족이 갑자기 네 명 더 생겼다


나는 여섯 살 말쯤,
엄마의 재혼으로 갑자기

언니 한 명, 쌍둥이 오빠 두 명이 생겨서

'오남매의 막내'가 되었다.


그 시절의 나는

어른들이 그리는 가정의 모양을 잘 몰랐다.

다만 언니 오빠들이 기분이 나쁘면

때리는 일이 많았고,

나는 그게 사춘기라는 것도 잘 몰랐다.


엄마와 재혼남의 싸움도 잦았다.
소리지르고 서로 물건을 던지고,

그릇과 거울이 깨지는 소리가

거실이랑 방까지 울렸다.


어느 날은
엄마가 재혼남에게 맞아 눈 수술까지 했다.


거기다가 경찰이 집에 온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경찰이 엄마를 잡혀갈까 봐
경찰 앞에서 “엄마 데려가지 말아달라”고
울며 매달리던 아이였다.


그러다 어느 날,

어떤 이유 때문에서인지, 내가 엄마에게 솔직히 말했다.


"언니오빠들이 이때까지 ~~~이렇게 저 때렸어요"


"서현이는 언니오빠들이랑 대디랑 같이 살고싶어?"


"아니요"


그 말은 엄마에게 큰 충격이었나 보다.

결국 엄마는 결국 이혼을 선택했다.


그건 누군가 대신 내려준 결정이 아니라

내가 용기 내서 꺼낸 한마디가 세상을 뒤집어놓은 첫 순간이었다.


나는 다시 둘만 남은 작은 가족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상처는 이미 깊게 새겨져 있었다.




잠 못 이루던 아이, 짙어진 눈 밑 그림자


그 시절 나는 유난히 호기심이 많았다.
새벽마다 우유배달이 몇 시에 오는지 궁금해서
밤에 한 번 깨면 다시 자지 않고
끝까지 기다렸다.


그 버릇이 몇 달을 이어졌고

그때 생긴 깊은 다크서클은

지금도 내 얼굴 아래에

어린 시절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혼란 속에서도 공부는 잘하던 아이


집안 공기는 늘 불안했지만
나는 공부만큼은 잘하는 아이였다.


유치원에서는 영어를 제일 잘했고,
초등학교에 가서는 공부방에 다니며
시험 결과에서도 상위권을 유지했다.


한자 8급, 7급, 준6급까지 땄고,

수학 경시대회에서는 장려상을 받았다.
필리핀에서는 수학이 재미있어서
학교에서 수학 1등 상도 받았다.


그랬던 내가
한국에 돌아온 뒤 갑자기
집중이 안 되고
책만 펴면 머리가 멍해지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 변화가
무엇보다도 나를 가장 두렵게 했다.




필리핀 귀국 후 시작된 낯선 변화들


귀국 후
내 몸과 마음에는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다.


밤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 음식을 찾아 먹고,
평소 하지 않던 욕이 갑자기 입에 붙고,
귀신이 보이고 들렸으며,
몸에서는 이유 없는 찬 기운이 계속 도는 이상한 상태.


어릴 때부터 신앙심 깊은 천주교 신자였던 나에게
그 시기는 설명할 수 없는 공포였다.


그 이상함을 가장 먼저 눈치챈 건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는 자기 여동생의 지인이던 무당 이모에게 나를 데려갔다.




굿을 해야 한다는 말, 그리고 몇 주 뒤의 굿판


무당 이모는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마치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지금 너 춥지?"

"네"


"찬 기가 있네 한 번 이모 손을 잡아봐"


이러더니 온갖 귀신들 빙의를 하기 시작하셨다.


"굿을 해야돼"


바로 굿을 한 건 아니었다.

굿 날짜를 잡고 준비하면서

며칠, 몇 주가 흘렀다.


그리고 굿날.

지금도 기억이 탁하게 남아 있다.


북소리.

흔들리는 촛불.

사람들의 고함.

그 사이에서 어떤 무당 이모는 말을 이어갔다.


"강물에 빠져 죽은 스물여덟 살 남자가 붙어 있어."

"굶어 죽은 친척이 새벽마다 배고프다고 한다."

"엄마가 신을 안 하면 네가 이어받아야 한다."


엄마가 유산한 아이들까지

내게 붙어 있다고 했다.

신할머니의 분노까지 달래야 한다고도 했다.


굿 이후

귀신이 보이던 기운은 줄어들었지만

무속에 대한 공포만

내 안에 깊게 남았다.




폭력, 멍, 그리고 정신과 진단


굿이 끝났다고
집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폭력은 반복됐고
나는 점점 흔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상태를 본 숙모가
그냥 두면 위험하다고 판단해
나를 정신과로 데려갔다.
(그때는 아직 112 신고 전이었다.)


검사 결과는 단단하게 한 줄로 정리됐다.


성인 ADHD.
우울증.


필리핀에서 상위권을 유지하던 아이였고,
수학을 누구보다 잘하던 아이였는데
왜 갑자기 집중이 안 되었는지


그 모든 이유가
그날 한 번에 설명되었다.


그때야 알았다.
나는 나태했던 게 아니라
그저 너무 아팠던 거라고.


그날 이후
매일 아침 정신과 약을 먹으며
나를 다시 세우는 법을 배워갔다.




112 신고, 그리고 쉼터에서의 재정비


상황은 점점 더 위험해졌고
결국 나는 스스로 112에 신고했다.


그 일로
학대피해아동쉼터에 입소했고
그곳에서 중졸 검정고시 공부를 이어갔다.


이후 구청 연계를 통해
더 오래 머물 수 있는
여자중장기청소년쉼터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나는 오랜만에 숨을 고르고
무너진 마음을 다시 붙였다.


그리고 중졸 검정고시는 결국 합격했다.




17살, 교복을 입다


쉼터에서 지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학교… 다시 가볼까?”


서류를 준비하고, 면담을 보고,
절차를 하나씩 밟았다.


그리고 17살 5월 말,
나는 여자고등학교에 추가입학했다.


그날 교복을 입고 거울을 바라보면서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온 내가, 참 대견하다.”




수업보다 더 어려웠던 건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수업은 어렵긴 했지만
노력하면 따라갈 수 있었다.
문제는 교실의 분위기였다.


내 이야기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가 모르는 방식으로 퍼져 있었고
내가 들어가면 대화가 갑자기 멈췄다.


힐끗거리는 시선,
뒷담, 앞담.


그 시절의 나는
문제 있는 아이가 아니라
문제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버티던 아이였는데
교실은 그걸 몰랐다.


결국 마음을 안정시키고자
쉼터 아래층에서 운영되던
대안교육위탁기관 프로그램도 함께 다녔다.


그리고 참 아이러니한 건,
그때 내 뒷담을 하던 몇 명이
지금 나와 같은 대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이다.


마주쳐도 서로 아무 말 하지 않는다.
그 시절의 공기를
누구도 꺼내지 않는다.




성적표 한 장, 그리고 조용한 결심


첫 시험 성적표.
내 이름은 아래쪽에 있었다.


굿, 폭력, 신고, 정신과 치료, 쉼터, 검정고시…
너무 많은 걸 지나온 나에게
‘내신 경쟁’은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나는 조용히 결론을 내렸다.


“정시. 이게 나에게 맞는 길이다.”


나는 자퇴를 선택했다.


자퇴서를 제출하던 날
손은 떨렸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고요했다.


그날은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지켜준 첫 번째 선택이었다.


자퇴 후
쉼터도 퇴소했고
나는 할머니 집으로 옮겨
다시 천천히
내 삶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들에게 자퇴는 실패일지 몰라도
나에게 자퇴는
처음으로 ‘나’를 선택한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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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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