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눈부신 햇살에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출발 시간에 늦은 건 아닌지 확인하려고 급하게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안드로메다에 갔던 정신이 돌아오자 나는 동상처럼 멈춰버렸다.
‘아, 우리 이제 안 걸어도 되지?’
알람도 울리지 않았는데 화들짝 놀라서 일어나고 보니, 어제까지였다면 이미 걷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늘어지게 자다가 일어나도 되는데, 잠이 확 달아나게 놀라서 깨버린 게 억울했다.
우린 어제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고 한식당과 한인마트를 돌며 그간 못 먹은 한식에 대한 한을 풀었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완주기념 과자파티를 하기로 하고 간식거리를 잔뜩 사 왔는데, 우리 둘 다 피곤해서 일찍 잠들어 버렸다.
오늘은 산티아고에서 하루 더 머물며 대성당에서 하는 순례자 특별 미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몸을 움직였더니, 온몸 구석구석에서 비명을 지른다. 다리는 쑤시고, 당기고, 욱신거리는 3종세트 증상을 선보였고, 등 하고 허리는(도대체 왜 아픈 거지?) 누구한테 엄청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완전 떡실신 상태로 자고 있는 유림이를 보니 깨워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 아침식사는 패스! 오늘 점심 식사도 한식당을 예약해 놨다. 한식이 지겹던 사람도 순례길을 한번 걸어보면, 한식 왕팬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순례자 특별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대성당을 찾기 때문에, 미리 가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래서 우리는 저녁 일곱 시 삼십 분 미사를 위해 약 사십 분 전에 성당에 들어갔다. 하지만, 우리가 들어갔을 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상황이라, 우린 꽤 뒤쪽에 떨어져 있는 의자에 겨우 앉을 수 있었다.
스페인어로 반복해서 안내 멘트가(아마도 조용히 하라는 안내였을 듯함.)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소리 죽여 대화하는 소리가 웅성웅성 들린다. 그중 뭔가 불편한 듯 한 아기가 계속 울어대는 소리도 들려온다.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는 안내판을 보며 들어왔는데, 사람들이 요령껏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아쉬운 마음에 성당 내부 사진을 재빨리 찍었다.
나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 그래서 미사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모른다. 그래도, 우리의 첫걸음은 종교적인 의미가 아닌 순례길이었지만, 이 걸음의 끝은 믿음으로 마무리 짓는 순례길이고 싶었다. 그 믿음이 신을 향한 것이든, 우리를 향한 것이든 간에 말이다.
미사는 경건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어릴 때 열심히 외웠던 주기도문처럼, 똑같은 말을 다 같이 외치는 기도도 있었다. 우리는 함께 기도문을 외칠 수는 없었지만,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정도는 함께 하며 눈치껏 미사에 참여했다.
미사 중간에 주위 사람들과 인사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우린 말을 알아듣지 못해 멀뚱히 서 있다가, 옆에 앉은 아주머니와 앞에 앉은 아저씨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자 나도 웃으며 목례를 했다. 다들 쪽쪽 소리를 내며 볼키스 인사를 하는데, 한국인인 우리에겐 어색한 인사라 환하게 웃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대성당에서 미사에 참여하며 우리가 걸은 보름간의 걸음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많이 걸으면서 생각도 많이 하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걸을수록 오히려 아무 생각을 안 하게 된다는 걸 알게 됐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걷다 보면 머릿속이 점점 깨끗해지고, 아무 생각 없는 머릿속에 걸을수록 새로운 것들이 다시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냥 매일을 얼마나 걸을지, 어디서 쉴지, 무엇을 먹을지만 생각했는데,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것들이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순례자 특별 미사에 참석하러 산티아고대성당을 다시 찾았다.
우린 산티아고를 떠나는 방법으로 기차를 선택했다. 사실 나의 실수로 산티아고 공항이 아닌, 기차로 삼십 분 정도 떨어진 도시의 공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예약한 것이다. 우린 이 또한 좋은 추억으로 남을 거라며, 산티아고 기차역을 향해 걸었다. 이제 걸어서 삼십 분 정도의 거리는 멀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유림이와 나는 익숙하게 손을 잡고 함께 걸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이렇게 추억이 되지만, 이제 우리 앞엔 더 길고 긴 인생의 순례길이 펼쳐진다. 나와 내 딸의 인생에도 화창한 날과 흐린 날이 있고,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있을 것이다. 어떤 날에 어떤 길을 걷게 되더라도, 지금처럼 딸의 손을 꼭 잡고 걸어주는 엄마이고 싶다. 그리고, 나의 딸에게 힘들고 지칠 때가 오면, 한순간이라도 이 길을 걸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길 바라본다.
우리는 언젠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시 걷게 될 것이다. 그때 각자 걷게 될지, 또 함께 걷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또 한 번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는 그날 다시 걷게 될 것을 확신한다. 그날을 기다리며, 우린 일상이라고 부르는 인생 순례길을 힘차게 걸어 나갈 것이다. 지금처럼 두 손 꼭 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