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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귤 Jun 06. 2023

삶은, 감자

쫀득 포슬 짭쪼름한 삶은 감자처럼 살자

[다귤이가 일어나서 읽어보자]


5교시 국어 시간, 식곤증에 꾸벅이며 졸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호명하셨다.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무얼 읽으라는 것인지 몰라 짝꿍 준하의 교과서를 닳도록 곁눈질했다. 준하는 손가락으로 72쪽을 툭툭 가리켰다. 72쪽을 펴니 정진규 시인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들도 그렇게 둘러앉아

삶은 감자를 먹던 때가 있었다

...     


낭송이라긴 부끄러운 비몽사몽 간 글자 읽기를 끝내자 선생님이 물으셨다. 

[여기서 감자가 상징하는 게 뭘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 [.. 고소함?] 하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답을 듣고 ‘허!’ 하고 기가 찬 바람 소리를 내시더니 웃으셨다. 애들도 저마다 키득이며 따라 웃기 시작했다. 수업에 집중하라는 핀잔과 함께 자리에 앉은 뒤 선생님의 작품 해석을 들었다. 가난과 노동에 지친 식구들이 모여 앉아 밥 대신 감자로 허기를 때우고 있다는 것. 시 아래에는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 크게 삽입되어 있었다.     


네덜란드 반고흐 미술관에서


감자에 빨간색 펜으로 밑줄을 긋고 ‘화자의 가난한 처지 상징’을 받아 적으면서도 나는 도통 공감이 되지 않았다. 밥 대신 감자를 먹는 건 특식 아닌가. 엄마가 간식으로 감자를 삶아 두고 출근하신 날에는 하루에도 6알, 7알을 거뜬히 먹었다. 


소금이냐 설탕이냐 쟁쟁한 논쟁이 있지만, 우리 집에선 미리 껍질을 벗기고 소금과 사카린으로 간을 해 감자를 삶아 냈다. 그렇게 삶아 둔 감자는 한 김 식어서 먹을 때가 가장 맛있다. 겉이 쫀득하고 속은 포슬하게 삶아진 짭조름한 햇감자를 참 많이도 먹었다. 너무 많이 먹어 식사를 거른다고 부모님께 혼나기도 일쑤였다. 글쎄, 돌이켜 생각해보면 바쁘신 맞벌이 부모님이 만들어 준 유일한 간식이라 향수를 붙일 수도 있지만, 감자가 정말 맛있기도 했는걸. 수업을 들으며 감자 생각에 침을 꼴칵 삼킨다.     


덧붙여 감자의 매력은 그 무궁무진함에 있다. 감자튀김만큼 모든 양식과 어울리는 곁요리가 있을까. 감자칩만큼 다양한 종류의 과자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감자전, 감자떡, 감자옹심이, 감자 샐러드, 감자채 볶음, 심지어는 찜닭 속 감자들을 보더라도, 감자가 주는 미식적 쾌락이 얼마나 다양한지 알 수 있다. <감자 먹는 사람들>과는 별개로, 내가 지닌 감자의 상징은 그렇다.


선생님이 물으셨을 땐 잠에서 덜 깨어 시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순간 고소한 감자가 먹고 싶었나 보다. 오늘은 집에 가서 삶은 감자를 먹어야겠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마리 앙투아네트 말 같기도 하지만, 밥이 없으면 감자를 먹어보련다. 어둡고 가난한 시절에도 든든히 곁을 지켜주는 감자, 여기저기 아무 데나 어울리는 감자, 고소함에 웃음을 주는 감자를 오늘 삶아 내자. 그렇게 나도 살아 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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