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
거실을 돌다가 티브이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눌렀어요. 놀라운 소식이었어요! 그날 처음으로 소파에 엉덩이를 떨어뜨리고 앉아서 화면 속 작가의 얼굴과 책들을 멍하니 봤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어요. 바람이 세지 않은 한낮이었고, 잔디가 머금은 초록이 바다에까지 번질 것만 같은 뜨거운 가을날이었죠. 화면 밖으로 작가의 문장이 흘러나오자 야자수의 머리카락이 작가의 목소리에 맞춰 흔들거렸어요. 잔디를 밟는 부부, 야외 수영장에서 태닝을 하는 연인, 깔깔 거리며 홀웨이를 지나는 아이들, 그 모습에 덩달아 신난 조부모들까지. 가을 휴가를 즐기는 저마다의 가족들이 야자수의 굵은 머리칼처럼 느리게 춤을 췄어요. 한참이나 벅찬 마음이 가시지를 않는 거예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효도는 글렀네.'
이런 생각이 드는 거 있죠.
작가의 아빠는 지금 이 순간 얼마나 딸이 자랑스러울까, 기쁨의 정도가 가늠조차 안 되었어요.
'아빠는 좋겠다. 저분의 아빠는 정말로 좋겠다.'
이리도 위대한 일을 해낸 딸이라니요. 그리고······ 아빠가 떠올랐어요.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딸자식, 그런 자식을 둔 '나의 아빠'가요. 그때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어요. 바로 소파에서 일어나야 했어요. 긴 돌돌이(먼지 제거 테이프)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키니 머리카락이 잔뜩 붙은 돌돌이가 화면에 겹쳤어요. 이 날따라 팅팅 불은 발바닥이 쓰라렸어요. 발목을 꺾어서 발바닥을 보니 아침에 새로 신은 양말에 구멍이 난 거예요.
티브이를 껐어요. 리모컨을 탁자에 내려놓고 반듯하게 1자를 맞추면서 테이블 모서리에 있는 얼룩을 지웠어요. 체크인 예정 객실이 밀려서 일을 서둘러야 했어요.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이 층에서 저 층으로,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하루에 먼지테이프 한 통을 몽땅 쓰고, 평균 만 오천보를 걸어야 끝이 나는 일. 아빠의 딸은 오성 리조트에서 일을 합니다. 그리고 오늘 접한 빅뉴스 덕분에 종일 '아빠'가 떠올랐어요.
오성 리조트에서 일해요
스무 살이 되어서 집을 나왔었죠. 아빠의 품을 떠나고 한동안은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아빠' 하고 부르고 싶어서 한 달에 한 번, 세 달에 한 번 고향을 찾아갔죠. 아빠는 언제나 "기다릴게"라고 말했어요. 아빠와 헤어지기 전날에는 새벽까지 편지를 썼어요. 헤어질 때 아빠는 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딸은 아빠에게 쓸 수 있는 모든 문장을 내어 줬죠.
아빠의 품속에서 살았던 세월보다 품 밖에서 지내는 세월이 길어지면서 일 년에 한 번, 삼 년에 한 번······ 우리는 멀어졌어요. 아빠에게 전하는 문장이 메마르고 아빠와 나 사이에 어떤 문장도 남아 있지 않던 어느 날 세상에, 세상이 20년이나 훌쩍 지나 있었어요.
죽지 않으려고 떠났어요. 고통을 따져 묻지 않고 내 안에 파묻으려고요. 그러나 그 많고 많은 날들 중에 아빠의 사랑으로 단 하루도 살아지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이 시대 '원조 딸바보'인 아빠는 멀리에 딸을 두고 어떻게 참고 살았나요? 서운한 날이 많았나요? 꿈을 이루고 멋진 사람이 되어서 아빠와 가까이 살 날을 꿈꾸지만 마음처럼 되지가 않았어요.
지난달,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집이 아닌 장례식장에서 아빠를 만났죠. 섬을 떠난 게 몇 해 만이었는지 몰라요. 입관식 막바지에 겨우 도착해서 어릴 적 키워주신 외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렸어요. 외할머니의 볼이 너무 차가웠어요. 입관식이 끝나고 아빠의 따뜻한 품에 안겼죠. 그순간 아빠와 친척들과 심지어 저까지도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호호 노인으로 변장을 한 것 같은 장면에 기분이 이상했어요. 마치 막을 내리자마자 곧장 걷어올린 무대처럼 시간이 멀리뛰기한 거죠.
짧은 방문을 마치고 섬으로 돌아가려는데 아빠 앞에서 눈물이 차올랐어요. 다음에 만날 때 지금보다 고통은 줄고 우리는 더 늙어 있겠죠.
"왜 우냐."
아빠가 다정히 묻는데 이유를 모르는 나는 아빠의 얼굴만을 보고 또 보았어요. 그러다가 아빠의 눈이 내 눈이 아니라 내 입을 향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만 바닥에 얼굴을 떨궜어요.
올해 열세 살이 된 반려견 '우유'는 요즘 부쩍 눈이 어두워져서 저를 자꾸만 놓치고, 제 소리를 잡으려고 갈팡질팡해요. 한쪽 귀가 어두운 아빠가 내 앞에서 귀가 아닌 눈으로 딸의 말을 듣고 있는 순간, 그 순간순간이 나를 찾고 있는 나의 강아지처럼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느껴졌어요. 그순간 아빠와 나 사이에 달라진 것은 '나를 이루지 못한 나'이고, 그대로인 것은 '나를 사랑하는 아빠'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어떻게 이런 딸을 사랑할 수가 있나요. 어떻게 트로피 대신 한 손에 돌돌이와 다른 손에는 걸레를 들고 있는 딸을 여전히 최고로 여길 수 있는 거죠. 어떻게 헤어질 때 문장조차 내어주지 않는 딸을 전처럼 기다릴 수가 있는 거에요.
그래서 저도요, 아빠에게 주었던 것들을 다시 꺼내려고 해요. 두둑한 현금 뭉치나 영광스러운 트로피면 더없이 좋겠지만요, 딸의 그 무엇도 기쁨으로 봐줄 아빠이니까요. 그것이 짧은 안부이든 지금처럼 엉망인 질문일지라도 말이에요.
피해를 주고도 거꾸로 가해자 행세를 하는 인간은 왜 그런 거예요, 아빠?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서 위선으로 치장하는 인간은 왜 그래요, 아빠?
가치를 돈에 두지 않으면 뒤쳐진 인생이고 멈춰 있다고 욕을 먹어야 하나요, 아빠?
앞으로 40년, 저도 아빠의 나이가 되면 무엇에도 덤덤해지나요,
아빠?
일을 그만둔 지 보름이 지났어요. 상사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했어요. 섬에서 살면서 이번 여름처럼 덥고 변덕스러운 계절은 처음이었어요. 기후가 이상함을 느껴요. 지구도 인간을 견디지 못하나 봐요. 그렇다면 인간을 견디지 못하는 지구에게 잘못이 있는 건가요?
아빠. 딸은요,
눈에 보이는 것을 재빠르게 알아채지 못해요.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는 건 잘해요. 추악한 영혼을 마주하기 힘들어하고, 밀도 있는 시간을 아주 잘 보내요. 지옥 같은 인간들보다 천국을 훨씬 많이 알고 있고요. 인간을 믿지 않아도 인간애는 타고났어요. 셋 이상 모이면 불편하지만 개들과는 괜찮아요. 개들의 순정은 인간이 따라 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고난을 홀로 지날 수 있어요. 오전 열 시 십 분을 좋아해요. 때로는 시간이 없는 시계를 만들 수도 있어요. 즐겁게 하루를 보낼 친구가 있고요, 딸을 아껴주는 존재들이 쉬지 않고 나타나요. 인간을 좋아하지 않아도 진심을 감지한 찰나에는 심장이 마구 저려요. 유명하지 않아도 무명한 것들로만 죽을 때까지 삶을 밝힐 수 있고요, 꿈이 꺼지지 않도록 스스로의 영혼에 불 붙일 수 있어요. 그 기저에 아빠가 있어요. 아빠의 사랑은 나에게 숨이고 집이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에요. 아빠는 딸의 변함없는 사계절에요.
올해도 이른 새벽에 동네 산에서 하나 둘 모았을 아빠의 선물이 도착했네요. 이렇게 살찐 밤이 딸에게는 가을이에요. 아빠는 어떤 계절을 좋아해요? 하루 중 몇 시 몇 분을 가장 좋아하나요? 오늘 하루는 뭘하며 보냈어요? 앞으로는 시간이 없는 세상에서 아빠를 부를 거예요. 성취에 안달하지 않고, 효도에 쫓기지 않는 마음으로 아빠에게 딸의 문장을 바칠게요.
(네, 아무래도 빠른 시일 내에) 효도는 그른 것 같아요. 효도는 글렀지만 사랑해요 아빠. 봄이 오면 한라산에 오르기로 했었죠?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매일 산을 타고, 8~9시간의 산행도 해내는 아빠가 딸은 무척이나 자랑스러워요. 아빠의 단정함을 사랑하고, 자신을 관리하는 모습을 존경해요. 이 무한한 생의 어느 지점에서 어느 날 우리는 같이 걷고 있을 거예요. 우리는 만날 거예요.
살찐 가을밤 내가 가진 천국 중에 하나 무한 시계
⚶개똥도 약에 쓰이는, 우리집 철학⚶
살찐 가을밤.
내가 가진 천국 중에 하나.
시침, 분침, 초침이 없는 무한 시계.
헤어짐이 없는 꽃밭.
······ 아빠.
아빠!
❙ 오랜만이죠. 기다리고 사랑해주는 이 무한한 마음으로 부디 따뜻한 가을, 겨울을 나시길 바랄게요.
❙ [개똥철학] 다음 연재는, 망고의 콧등에 하얀 눈송이가 앉기 전에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한한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