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토마르
브런치에 글을 쓰지 않는 동안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다.
다시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목표는 돈과 성장보다 안정적인으로 일할 수 있는 곳
하루에 14시간 이상을 앉아 NCS 공부를 했고, 체력을 유지해야 하기에 아침 수영까지 다니다 보니, 글을 쓰는 행위가 사치라는 생각이 들어 멀리했다
인대가 끊어져 한 달여간 반깁스를 하고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에서도, 차리리 움직이지 못하고 의자에만 앉아서 공부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취뽀(취업한다는 말로 쓰는데, 정확한 뜻은 모름)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가진 특성과 잘 안 맞는 시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분에 1문제를 풀어야 하는 NCS 시험은 문제를 검토하고 역산까지 하는 내 스타일과는 너무 달랐다.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처음으로 내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품었다.
그리고 몇 차례 도전한 시험에서 성적이 좋지 않아 '더 해도 나는 안될 거야' 라며 포기했다.
이후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2시간 떨어진 중소기업에서 나쁘지 않은 연봉과 직책을 제안해 취업을 했지만, 못다 이룬 안정적인 직장에 대한 미련이 남더랬다.
2개월 간 바쁘게 회사를 다니며 우연히 이전에 준비했던 기관에 시험을 볼 기회가 있었고, 면접까지 잘 마쳐 그제 최종합격 통지를 받았다.
5년 전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을 때 내 모든 운을 다 썼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운이 남아있었나 보다.
올해는 단조로운 일상을 지겨워하던 찰나에 꾼 스펙터클한 꿈처럼 지나간 것 같다.
치열하게 분주하게 살았던 꿈같은 2023년을 지나 단조롭지만 안정적인 2024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를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현황 보고는 여기까지! 다시 과거로 넘어가 보자
어제 콜레가에 이어 오늘은 토마르로 가는 날이다.
리투아니아 순례자의 조언에 힘입어 쉬지 않고 31km를 걷는 것이 목표다.
룸메이트 리투아니아 순례자가 먼저 출발하고, 나도 급하게 가방을 메고 나왔다. 어제 사놓은 빵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시간당 5킬로의 속도로 약 4시간을 걸었다.
여태껏 나는 남보다 강한 멘탈과 체력을 가졌고 이에 걸맞게 남들과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걷는 발걸음마다 이 생각이 얼마나 자만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틀린 생각이었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타인보다 더 나약해 그저 보기 좋아 보이는 인생에 치우쳐 살아왔다. 내면의 성숙을 외면하고, 그저 경주마처럼 달려왔다.
산티아고를 온 이유도 마찬가지다.
실패를 허울 좋은 말로 포장해 성공으로 꾸며내고 싶어 산티아고까지 왔다.
내가 그간 쫓았던 멋진 인생들은 대부분 현실과 부딪히는 걸 피해서 한 도피처였다는 걸 깨달았다.
퇴사 전 남편에게 둘 다 퇴직하고 세계여행을 떠나자고 했던 말들, 퇴사 후 쫓기듯 급히 떠나온 산티아고 순례길
다녀오기만 해도 내가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이 사라질 것이라는 헛된 믿음
마치 듣기만 해도 영어 실력이 늘어난다던 유튜브 콘텐츠를 그저 틀어만 놓는 선택처럼, 인생도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그토록 외쳤던 세계여행을 가면 내 인생이 행복해질까? 절대 아니다.
적당한 스트레스, 이로 인한 고통이 있어야 행복한 순간을 진정 행복하다 느끼는 것이다
그 사실을 몰랐던 나는 애써 산티아고 행 티켓을 끊었고, 집 떠난 지 6일 만에 이를 깨달았다.
이 6일의 시간 동안 30년 간 꽁꽁 숨겨놨던 진짜 나를 만났다.
진짜 나를 인정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다른 사람에게 멋진 인생을 뽐내고자 아등바등 살지 않을 것이다.
내가 행복했던 순간은 퇴근 후 남편과 함께 먹는 치킨과 맥주, 딱 그 정도였다.
이 안정적인 행복을 최선으로 살아내는 것이 맞다. 옳다.
이런 생각들 덕분이었을까.
35km, 4만 9 천보를 단숨에 걸었다.
토마르에 도착해 알베르게에서 짐을 풀고 있으니, 어제 룸메이트였던 리투아니아 순례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oh my god, you are so fast”라는 말에 “it is thank to you” 라 답했다. 그녀의 조언 덕분에 체력의 한계를 이겨내고 이리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으니까..
오늘 묵을 토마르는 기사의 마을이라고 한다. 포르투갈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큰 성이 있고 마을 전체가 중세시대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지 관광객도 많고, 식당도 많고 볼거리도 많다.
첫날을 제외하곤 걷고 나와 마을을 둘러본 적이 없는데, 활기찬 마을 풍경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무겁게 들고 와 가방 안에서 숙성시키고 있는 카메라를 들고 마을 곳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이제야 산티아고 순례길을 즐기게 된 것일까?
내일도 이런 가벼운 마음으로 잘 걸을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래도 내일은 26km로 짧은 길이니, 부담은 덜하다.
앞으로의 인생에 부엔 까미노가 아닌, 당장 내일 걸을 길에 부엔 까미노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