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군분투 서른살 Aug 23. 2023

어? 이게 아닌데

08. 무언가 잘못된 거 같다.

오늘은 산타렘에서 골레가까지 38km를 걷는 일정이다. 

어제 자기 전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식량도 비축하고, 안쓸 거 같은 물건을 버려 배낭의 무게를 줄였다.


자는 둥 마는 둥 뒤척이다 보니 벌써 알람이 울린다.

11시부터 장렬하는 포르투갈의 햇빛을 피하기 위해 오전 4시에 기상해 4시 30분에 숙소에서 나왔다. 

해 뜰 무렵 붉게 물든 땅, 어디서도 쉬이 보지 못할 풍경이다.


오늘도 걷기 파트너는 네덜란드 친구 플라워 

어제 나보다 2시간을 늦게 도착해 푹 쉬지 못했을 텐데, 아침이 되니 쌩쌩하다. 

어제 걸어왔던 풍경과 비슷하게 포도밭이 10km가량 쭈욱 있다.

혹여나 포도밭주인이 근처에 있을까 싶어 후달거리며 따먹어 본 포도는 사이즈도 작고 달지 않아 아쉬웠다.

한 2~3개월 후인 8월~9월에 가는 분들은 트라이해 보시길!


3시간가량 걷다 마침 나온 마을에서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로 아침을 해결했다. 

아! 이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동안 물집이 전혀 안 생겼는데, 쉴 때마다 신발을 벗고 발을 말려줘서 인 거 같다. 

혹시 산티아고 순례길 가실 분들은 바세린+발 말리기 권법을 사용해 보시와요! 물집 무적 조합입니다.

플라워 나 꼬랑내 안 났지? 

까미노 데 산티아고!, 산티아고로 가는 길

앞으로 600km만 더 걸으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플라워를 앞질러 13km 더 걸었을까 

26km쯤 왔을 때 도착한 마을에서 숙소를 잡고 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12km 더 가야 있는 마을에 숙소를 예약한 ISFJ인 날 원망하며 땡볕에서 꾸역꾸역 걸었다.


지금쯤이면 2/3는 걸었겠지?라고 생각해 켜본 구글맵엔 왔더.. 헬.. 8.7km?

게다가 지금부터 걸어야 하는 길은 40도에 육박하는 기온에 8.7km가 쭉 차도 옆 길인 상황

지금 걸으면 백 프로 뇌가 녹거나 몸이 녹아서 앞으로 일정에 문제가 생긴다.

하지만 우버도 택시도 잡히지가 않는다. 후...

40도에 차가 쌩쌩 다니는 차도를 8kg 배낭을 메고 8km를 걸어야 한다니, 눈물이 도로록


남편도 보고 싶고 집에 있는 고양이도 보고 싶다. 심지어 네덜란드 플라워까지 보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더 이상 걷지 못하고 엄지 손가락을 쓰윽 올려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다. 

차 세 대를 보낸 끝에 도착지인 골레가에 살고 있는 여성분이 호의를 베풀어 주셨다.


차로 가니 20분도 안 걸려 숙소에 도착했다. 차를 개발한 이름 모를 과학자님 무한감사 

차를 태워준 분께 감사한 마음에 사례를 하려 했으나 극구 사양을 하신다. 

글로벌 인류애를 느껴 다시 눈물이 또로록, 오늘 눈이 마를 새가 없다.

숙소 도착해서 몸을 씻고 빨래를 한 후 점심 거리과 다음날 아침에 먹을 식량을 사러 마트로 향한다.

우리 집 고양이 대신 콜레가 고양이로 냥중농도를 채우고

숙소에서 만난 순례길을 5번이나 다녀온 리투아니아 여성분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이 메뉴는 포르투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합으로 한국에서 먹는 맛이랑 비슷한데 조금 짭다.

자려고 누워 활동기록을 보니 오늘 8km를 히치하이킹 한 덕분에 40km를 넘지 않고 도착했다.

로드킬 당할 뻔 한 날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다. 


저녁을 먹고 숙소에 도착해, 룸메이트에게 5번이나 이곳에 온 이유와, 어떻게 하면 잘 걸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의 직업은 테라피스트인데 자신의 신체와 정신이 건강해야 하기에 수련하듯 이곳을 찾는다고 얘기하였고 잘 걷는 방법은 쉬지 않고 쭉! 걷는 거라 얘기해 주었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각자 다른 듯 같은 목적으로 까미노로 오는 것을 보면 나도 이 길을 걷고 나면 내 인생에 도움이 될 무언갈 깨닫겠지? 그래야만 할 텐데..

오늘은 코 끝이 찡해지는 순간이 많았다.

체력이 완전히 소실된 상황에서 낯선 곳에 놓여있다는 느낌이 두려웠고 이런 순간에 대가 없는 호의를 받았다는 게 코 찡을 유발했다.


처음 출발할 땐 죽으나 사나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걸어내리라 생각했으나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순간이 오자 원대했던 결심은 쉽게 깨졌다.


비록 내 두 다리로 온전히 이 길을 걷진 못했지만, 몸과 정신을 벼랑으로 몰아버리려 온 것이 아니니

최선을 다해 걷되 무리는 하지 말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일은 리투아니아에서 온 순례길 경력자의 말을 따라 최대한 쉬지 않고 걸어보아야지.


부디 내일도 부엔까미노이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33km, 7시간을 걷다 깨달은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