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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군분투 서른살 Aug 22. 2023

33km, 7시간을 걷다 깨달은 것

07. 아 이 한심한 사람아

드디어 산티아고 순례길의 첫 삽을 뜨는 날이다.

네덜란드에서 온 친구와 아침에 같이 나가기로 약속을 했던지라 새벽 5시 즈음 눈을 떠 30분 만에 

후다닥 준비를 마치고, 알베르게 문을 열고 나왔다.

일출도 야무지게 보았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도 척척 잘 걷는 네덜란드 친구 플라워

얘기하면서 걷다가 떨어져서도 걷다가, 앞치락뒤치락하며 걷다 보니 처음으로 마주한 까미노 표식

길을 잃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가리비와 화살표 표식이 불안할 만하면 나타나줬다.

누군가가 의 애정이 담긴 귀여운 까미노 표식

이 길을 먼저 걸었을 타인의 따스함에 외로움이 조금 가셨다.


5시 30분에 출발해 8시까지 15km쯤 걷다 보니 앞서 가던 플라워가 작은 마을에서 쉬고 있는 걸 보고, 같이 아침을 먹기로 했다. 


확실히 1:1로 얘기하니 그나마 대화라는 걸 하게 된다. 

사적인 걸 물어보면 불편할까 싶어 아무 말 대잔치를 하던 나에게, 플라워는 몇 살이니?라는 질문을 했다.

'오잉? 이런 질문해도 되는 거였어?' 싶었다.


이후 나이, 직업, 전공, 결혼 유무 등 지극히 사적인 질문들로 호구조사를 마쳤다.


플라워는 대학에서 멘탈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 길에서 본인의 멘탈을 테스트해보고 싶단다. 나 역시 회사를 관두고 불안해진 마음을 다 잡고 묵묵히 내 길을 걷고자 이 길에 왔다고 하니 서로를 잘 돌봐주며 끝까지 완주해 보기로 의기투합을 했다.


뺑오쇼콜라와 제로콜라로 간단한 아침을 먹고 강렬한 포르투갈의 태양을 벗 삼아 다시 출발!

한 번 쉬고 출발하니 영 속도가 안 난다. 약 28km 정도 걸었을 때 해는 머리 꼭대기 위로 올라왔다.

어디에도 나무 그늘은 없고, 양 옆으론 키 작은 포도나무만 잔뜩이다. 

 

1km 걷고 5분 쉬고 2km 걷고 5분 쉬 고를 반복하다 더위와 배고픔에 머리가 어질어질 하다.


이 사진을 찍어 아빠한테 보내니, 아빠는 눈물이 날 거 같다며 제발 돌아와 달라며 간청을 한다..

이때부터 걸은 지 하루 만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나 정상인가요? 가 시작되었다.


5km를 걷는 동안 우버 어플을 10번 넘게 켰다 껐다 하며 자신과의 싸움을 했다.


혼자 걸으니 상황에 굴복하고 싶은 욕망이 꾸물꾸물 올라온다. 

다행인 건 이 시골길엔 우버가 없다는 것, 그냥 걷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걷고 걷다 보면 내 안의 부정적인 무언가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이건 고생일까, 고행일까, 과연 이 길을 다 마치고 나면 뭐가 달라져 있을까.

이런 순간이 닥쳐올 것을 예상하고 마음을 다 잡고 왔는데도 현실로 다가오니 나약해지고 만다.

오후 3시가 다돼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 호스트가 날 보더니 빨리 앉아서 물을 마시라며 물을 내주신다. 

물을 마셔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물 값도 안내고 얻어마셔버렸다.


그 무엇보다 맥주 한 잔이 절실하다. 

땀에 절은 몸과 옷을 씻어내고 마트에서 맥주와 치킨을 사 와 먹으니 이제야 정신이 든다.

이 맥주조차 없었다면 어떻게 버틸까! 포루투갈 맥주 찐하고 맛나다.

이 날 깨달은 건 나는 참으로 나약한 사람이라는 것

현실을 피하고자, 또는 극복하고자 온 순례길에서도 힘든 상황을 꼼수로 피해 가려 스스로를 보며

정신력이 강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약한 인간이라는 걸 인정했다.

산티아고에 오고 싶었던 것도 결국 불안한 마음과 상황을 멋지게 포장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란 생각도 든다.


멋지게 살아보고자 고군분투하지만 그럴 만한 배포도 정신력도 없는 나


산티아고로 향하는 20여 일이 그간 외면하고 살아왔던 부족함을 마주하는 시간이 될 거라는 직감이 든다.


하지만 내일도 걸어야지 별 수가 없다.


걸은 지 하루 만에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는 한심한 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걸 기특히 여기며

내일은 더 일찍 나와 해를 피해서 걷고, 식량도 두둑이 챙겨가야겠다.

이게 변변찮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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