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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터진마돈나 Nov 21. 2023

배낭족을 표방하면서 부르주아를 꿈꾸다.

치앙마이에서의 한 달 살기.


부부동반으로 단체 골프여행을 오신 분들, 네임보드를 들고 마중 나온 여행사 직원들, 꿀 떨어지게 달달한 커플 여행객들 사이에서 유독 도드라지게 쓸쓸해 보이는 건 비단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출발할 때와는 달리 왠지 모르게 한풀 기가 꺾인 나는 스스로를 독려하며 요동치는 마음과 시선을 부여잡고 짐을 챙겨 무작정 공항 밖으로 나와버렸다.

7년 만에 다시 찾은 치앙마이는 건기로 접어드는 시기여서 그런가 동남아 특유의 끈적하고 후끈한 열기가 한층 덜했다.

창피스러울 만큼 바리바리 싸 온 짐을 한 곳에 두고, 입고 온 맨투맨 티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쾌청하지도 찐득하지도 않은 치앙마이의 거친 공기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켜 마셨다.

민소매에 배낭까지 둘러메고 나니 왠지 유튜브에 나올 법한 전문 트래블러라도 된 것 같다.

'아~~ 이것이 바로 배낭이 주는 갬성인가~~'

잠시 자아도취에 취해있다가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아차 싶어 정신을 차린 뒤 미리 깔아 놓은 볼트 앱(우리나라의 카카오택시와 비슷)으로 기사를 호출했다.

여행 전에 블로그와 유튜브를 뒤져가며 조사해 온 여러 정보들 중에서 처음으로 시도해 보는 현장실습인 셈이다.

금세 볼트기사와 매칭된 것을 확인하고 나니  이른 자신감에 입꼬리가 나도 모르게 스르륵 올라갔지만, 그 입꼬리가 턱 아래로 내려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글과 영상으로 접한 정보와 현장실습은 테트리스의 첫 번째 판처럼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배낭족 코스프레를 하며 3천 원을 아끼려다 모두가 떠나버린 공항바닥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지는 처지에 놓여졌다.

얼마 전까지 비행기 안에서 샴페인을 마시며 한껏 부풀어있던 한 달 살기는 그렇게 돈 3천 원에 와르르 무너지고 삐걱대기 시작했다.


북적대던 공항에서 버림받은지도 모르고 오지 않는 기사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그렇게 30분을 공항바닥에  헌납하고

'나는 네가 올 때까지 계속 이곳에 있을 거야 '라는 분노의 메시지를 남긴 채 씩씩거리며 결국 공항택시를 잡아탔다.





잠시 잠깐 배낭족 흉내를 내보려다 현타를 얻어맞고 KO직전 숙소에 도착했는데, 만족스러운 룸 컨디션과 방안 가득 머금은 향기로운 냄새에 다시금 기분이 좋아진다.


유튜버나 블로그의 유명 인플루언서가 물가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동남아로 여행 오면서 로컬푸드를 몇 개 시켜놓고 "이만큼 다 먹는데 우리나라 돈으로 몇 천 원밖에 안 해요.. 1시간에 마사지가 만원도 안 해요.. 골프 그린피가 몇 만 원밖에 안 해요.. 수영장 달린 콘도 한 달 숙박비가 몇십만 원 밖에 안 해요.."

이런 정보를 쉬도 없이 제공한다.

나 역시 그들의 정보를 통해 흥미가 생겼고 그렇다면 나도 치앙마이에서 1년을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밑도 끝도 없는 1차원적인 생각을 했었더랬다. 그리고 그렇게 주워들은 얇은 정보를 주변에 뿌려댔다. "치앙마이에선 한 달에 이백만 원이면 골프도 치고 마사지도 받고 수영장 딸린 집에서 살 수 있대."

"나도 파이어족처럼 주식에 얼마 짱 박아놓고 1년만 나갔다 올까 봐. 글도 쓰고 유튜브도 하면서. 그러다가 운 좋게 주식이라도 올라서 1년 치 생활비라도 벌면 완전 땡큐인 거고 아니어도 어차피 한국에서 그만큼은 쓰고 사니까 그냥 경험하고 좀 쉬고 온다 생각하면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


' 인생이 내 생각대로만 된다면 지상낙원이란 건 로 없을지도 몰라. 삶 자체가 낙원일 테니.'


지금 나는 그때 무심히 뱉어놓은 이 얼마다 어수룩한 망발이었는지 확인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 인지도 모르겠다.




첫째 날의 실수를 만회라도 해보려 아침부터 다시금 배낭을 둘러맸다.

'오늘은 예쁜 카페에 들어가서 글도 쓰고, 마사지도 받고, 저녁엔 로컬음식에 맥주도 한잔 해야지'

애증의 볼트택시를 다시 불러 치앙마이의 제일 핫한 님만해민이라는 중심가로 향했다.

마사지 샵 위치를 확인하고 예약사항을 체크한 뒤,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가는 계획을 세웠다.

뭐 처음엔 어제처럼 계획대로 일이 술술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마사지샵 직원이 알려준 님만해민의 번화가는 걸어도 걸어도 좀처럼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블로그에서 봤던 분위기 좋은 카페와 음식점들은 대체 어디에 숨어있는지 그 길 위에서 태양과 마주한 채 걷고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그놈의 디지털노마드족 따라 한다고 노트북과 온갖 유튜브 장비들을 챙겨 나온 탓에 잔뜩 무거워진 가방 무게만큼 갈 곳 잃은 발걸음도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갔다.

'이런 젠장. 그럼 그렇지. 되는 게 없어 되는 게.'

애꿎은 신세를 탓하고 있을 즈음 허름한 로컬 음식점 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분위기고 뭐고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파서 더는 못 걷겠다 싶어 마지못해 들어간 곳.

그냥 제일 노멀해 보이는 것으로 주문을 하고 역시나 한국에서 앱으로 미리 깔아놓은 GLN이란 QR결제시스템을 이때다 싶어 처음 사용해 보았다.

블로그에서 배운 대로 "스캔~~?" 하고 물으니 직원이 QR코드가 찍힌 종이를 건네준다.

'오와~~~ 된다 돼. 이게 되네~~' 

별것도 아닌 일에 혼자 신기해하며 스스로를 기특해한다.

하루종일 굶주렸던 내 앞에 드디어 나온 치앙마이에서의 첫 끼.

맛있다. 별것도 아닌 것이. 그저 치킨 따위가 이렇게 맛있을 일인가 싶을 정도로 맛있게 먹었다.

'와~이건 찍어야 돼' 하고 서둘러 카메라를 켜서 서툴게 첫 음식영상도 담아본다.

'그래 이거지. 이게 바로 내가 블로그랑 유튜브에서 봤던 그런 그림인 거잖아. 짠~여러분~ 이렇게 먹고 2800원~'

하물며 나갈 때 보니 미슐랭 맛집이었다. 정처 없이 걷다가 우연히 들어온 곳이 미슐랭 맛집이었다니.

크크.. 이것이 바로 여행의 묘미인가.

별것도 아닌 일에 굳이 의미를 부여해 본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또다시 걷고 또 걸었다.

그다음 날도, 그 다다음날도. 하루에 최소 6 천보, 많게는 만보 이상 걸었던 것 같다.

숙소에서 나올 때부터 카페든 음식점이든 목적지를 정해놓고 볼트택시를 불러 그곳으로 이동했으면 고생도 덜 하고 훨씬 수월했을 텐데 왜 나는 똥고집을 부려가며 그렇게 정처 없이 떠돌았던 걸까.


어쩌면 언니와의 여행에 익숙해져 있던 나를 조금씩 걷어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5성급의 편하고 안락한 호텔도, 실패가 없었던 미슐랭 맛집의 음식도, 쉽고 럭셔리하고 체계적인 그 모든 것으로부터. 불편함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던 언니와의 여행에 이제 그만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느려터진 와이파이 때문에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갈 수밖에 없었던 첫 번째 숙소, 욕실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야리꾸리한 하수구 냄새 때문에 곤욕스러웠던 두 번째 숙소, 개미가 장악한 주방에서 바퀴벌레 약을 뿌리며 한바탕 전쟁을 치렀던 지금의 숙소까지.

나름 깔끔쟁이인 탓에 한동안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내 집처럼 냄새를 잡기 위해 캔들을 사다 놓고 욕실 구멍을 막아보고 개미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먹을 것과 식기류를 몽땅 다 냉장고에 때려 넣어 버렸다.

그렇게 한국에서의 내 생활을 고스란히 이곳 치앙마이에서까지 보존하려 아등바등하다 보니 어느덧 2주가 흘렀고 나는 이제야 이곳 생활에 조금씩 녹아들고 있는 것 같다.

여전히 많이 걷고 헤매고 실패하지만 블로거들이 맛집이라며 친절하게 소개해 준 곳보다는 그 상황에 맞게 내 눈에 들어온 곳에 들어가 보는 선택을 버리지 않을 생각이다.


며칠 전, 카페에서 글을 쓰다가 여행지 어딘가에서  글귀 하나가 떠올랐다.

'길에서 길을 묻다'

나에게 다시 찾아온  글귀는 마치 지금의 나처럼 헤매고 부딪쳐 본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용기 있는 물음 같았다.

여러 갈래의 길목에서 선택한 길이 하필 막다른 골목이었다고 한들 되돌아 나오면 그뿐.

2주 동안 걸었던 길목 대부분을 잘못 선택해서 '운도 지지리 없네, 어쩜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 '투덜대며 되돌아 나왔지만, 그 바람에 골목골목 어떤 길이었는지 더 명확하게 기억할 수 있는 수확을 얻었다.

걷고 부딪치고 지쳐서 이 길이 맞나 싶다가도 또다시 걷지 않으면 새로운 길을 만날 수 없다.

몸에 밴 오래된 습관과 취향을 쉽게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부딪쳐보자.

배부른 부르주아를 지금도 꿈꾸면서

한 번씩 동경해 오던 배낭족의 자유로운 감성만 모방하고 싶었던 것일지라도.

부딪쳐보자.

결국, 그 해답도 내가 걷고 있는 이 길 위에언젠가는 찾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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