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투병생활을 하며 힘들 때마다 자신에게 선물했던 가구들과 디자인 소품들을 동생과 부모님 집으로 보내고, 버리고 버려도 끝이 없던 옷과 신발들도 제 주인을 찾아 떠나보냈다.
여행할 캐리어 두 개와 골프백 한 개를 남긴 채 8개의 이민가방에 나의 짐들을 모두 담아 동생과 부모님 댁에 맡기고 나니 허전함보다 홀가분하단 감정이 더 커서 한편 놀라웠다.
언니가 떠난 집에서 동생과 둘이 보낸 마지막 밤은 어수선하게 널브러져 있는 이삿짐과 새벽 늦게까지 이어진 짐정리 덕에 그동안의 시간들을 추억할 여유가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단 생각이다.
언니의 집을 정리하면서 졸지에 나에게 남겨진 큰돈으로 처음엔 조그만 아파트를 얻고 자그마한 샵을 오픈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생각이 점점 작은 아파트에서 조금 더 큰 아파트로, 저렴한 지역에서 조금 더 나은 지역으로, 작은 중고차에서 수입 중고차로, 작은 샵에서 좀 더 몫 좋고 번듯한 샵으로 생각이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서워졌다.
내 것도 아니었던 큰돈으로 인해 변화하는 내 마음의 작은 소용돌이들이.
10평 남짓하던 곳에서도 복작복작 잘 지냈던 시절, 400만 원 주고 산 10년 된 중고 소나타를 끌고 다니면서도 당당하게 청담동에서 발렛을 맡기던 그 시절의 나는 사라져갔다.
물론, 상황이 변했고 그동안 고생했으니 나의 몫이라고도 생각하며 합리화를 시키기도 했다.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그럴싸하게 합리화하고 있다는 것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점점 더 나은 것으로 번져가는 물질적 욕망을 적당한 선에 타협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결정했다.
차라리 집도 가게도 접어두고 떠나보기로.
혼자라서 가능하기도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내 인생에 또다시 이런 기회가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나이와 반비례하게 줄어드는 용기가 1년 후 5년 후의 나를 다시 떠날 수 있게 할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다.
그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노마드족이니 파이어족이니 나라고 못할 건 뭐람. 영어를 못해도, 나이가 많아도, 혼자여도 뭐 어때.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나도 한번 만들어 보는 거지. 이보다 더 절묘하고 완벽한 타이밍이 있을 순 없어.
나는 결정을 내리고 부모님께 조심스레 내 생각을 전했다.
나이 먹은 딸을 이길리도 만무했지만 한 걱정을 하며 반대할 거란 예상과 달리 부모님께서는 몇 가지의 당부를 전하며 나의 의견과 결정을 응원해 주셨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네가 원하는 대로 한번 살아보라고.
주위의 걱정스러운 눈빛도 멋지다고 응원해 주는 마음도 나를 내딛게 해주는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기꺼이 집을 버렸다.
그리고 4일 후,
언젠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비행기 안에서 아쉬움 가득한 나에게 해주었던 언니의 말을 떠올리며
내 해외여행의 거의 모든 순간을함께 했던 언니가 살고 있는 하늘 위로 나는 홀로 날고 있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니. 난 여행을 끝내고 돌아가는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 집이 있으면 언제든 다시 떠날 수 있는 여행자이지만 돌아올 곳이 없다면 그저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자 떠돌이일 뿐이야. 그러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지금을 아쉬워하지 마."
예전 언니의 말을 곱씹어보며 나는 어릴 적 반항끼 가득한 내가 되어보기로 했다.
돌아갈 집이 없는 방랑자의 삶을 잠시 살아보면서 그동안 잊고 지낸 집의 소중함과 집이란 본연의 의미를 깨닫게 될 즈음 나는 방랑을 멈추고 여행자가 되어 돌아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