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놀랍고도 슬프지만 즐거운 태국 항구
여자 항해사부터 선박교통관제사까지
후덥지근한 태국 방콕에 도착하니 꽃배가 접근했다.
공무원과 한통속이라 꽃배를 허락하지 않으면 입출항 서류를 통과시켜주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꽃배라니! 나는 꽃배는 옛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그런 건 줄 알았다. 2008년도에 꽃배라니!
꽃배라는 게 뭐 예상하듯이 여자들을 가득 태운 부실한 배를 말한다. 진짜 부실하다.
40대 미혼인 남자 선장님은 내 눈치를 봤다.
선내 유일한 여자 선원인 내가 어떨지 걱정 되셨을 거 같다.
뭐 근데 거기서 내가 뭘 할 수 있나...
그냥 그런갑다 하는 거지.
나중에 알고 보니 꽃배를 타고 온 여자들이 각 방에서 한명씩 선원들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단다.
그런데 나와 같은 층을 사용하던 선장, 기관장, 2항기사, 3 기사는 선내 방음이 좋지 않아서 그런 건지 내 눈치를 보았는지 여자들을 내보냈다고 했다.
어쩐지 나랑 한명도 안마주치더라. 그래서 몰랐다.
나는 속으로 내 방에도 한명 보내주지... 외롭고 심심한데 여자랑 대화하면 좋을 것 같은데 싶었다.
상사들과 하는 대화 말고 정말로 편한 수다가 그리웠다.
사람의 온기도 그립고 항상 긴장되어 있는 것도 힘들고...
듣기로는 나랑 다른 층을 쓰는 한국인 1항기사, 갑판장, 조기장, 조리장, 실항기사들도 다 그냥 돌려보냈다고 했는데 모르겠다.
근데 다들 내 눈치를 좀 많이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없었다면 신나게 즐기셨을 수도?
미얀마 부원들은 정말 재밌게 즐겼다.
휴게실에서 밤마다 노래방 소리가 신나게 흘러나왔다.
유부남이 대부분이었는데... 설마 이래서 태국에 오는 걸 좋아한 건가? 하하하
얼마나 즐겼는지 변기통에 콘돔을 실수로 넣는 바람에 막혀서 3기사가 파이프라인 뜯어 수리한다고 고생을 많이 했다.
으으으... 그 냄새란... 안쓰럽다.
꽃배를 타고 온 여자들은 선원들 방에 섞여 들어갔는데 다른 사람들이 더 있었다.
그 여자들에게 밥을 해주는 할머니, 그 여자들을 보호?감시하는 아저씨는 갑판 위 빈 곳에 텐트를 치고 숙박을 했다.
요리하는 도구들도 어떻게 설치한 건지 뚝딱 간단하게 구석에 만들어졌다.
거기서 여자들과 같이 식사를 했다.
여기서 만들어진 요리는 그들만을 위한 건 아니었다.
화물 작업을 하러 사람들이 올라오는데 한국보다 3배는 많은 숫자가 올라왔다.
그리고 그들은 밤에도 배 위에 머물렀다.
해먹을 여기저기 곳곳에 치고는 그곳에서 쉬고 자는 거였다!
세상에나! 이 배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탈 수 있는 것이었나!
그때서야 각 층에 있는 선내와 외부를 통하는 문들을 모두 잠갔다.
방문도 꼬박꼬박 잠갔다.
안전한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조기장님이 만든 화장실은 엄청나게 유용했다.
배를 오래 탄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선견지명이었다.
놀라는 것도 잠시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금방 익숙해졌다.
나를 신기한 동물 보듯 쳐다보는 일은 더 익숙한 일이었다.
금세 시스템이 자리 잡히고 상륙을 기대하고 있었다.
언제 나갈 수 있지? 누가 먼저 나가지?
선박에서 누군가는 당직을 서야 하니 눈치를 보았다.
그래도 접안시간이 길었으니 번갈아가며 나갈 수 있었다.
회사에서 나온 화물감독님이 우리에게 맛있는 걸 사준다고 했다.
1항기사님을 빼고 사관들만 다 같이 나가게 되었다.
근사한 외부 레스토랑에서 똠양꿍을 먹고 청량한 목소리를 가진 가수의 라이브를 들으며 우리는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선장님이 노래 한 곡 해보라는 소리에 주니어 사관들이 노래 솜씨를 뽐냈다.
나도 한 곡 부른 것 같기도;;; ㅎ
선기장님들도 부르라고 재촉하니 기관장님이 먼저 중후한 목소리로 근사한 노래를 불렀고, 선장님도 마지못하는 척 하면서 한곡 멋드러지게 불렀다.
다들 긴장이 풀어지며 분위기가 굉장히 좋았다.
그렇게 고조된 분위기는 그대로 룸 술집으로 이어졌다.
이쁜 여자들이 한 줄로 주욱 들어왔다.
다들 순서대로 한명씩 골랐는데 이번에도 나에게는 아무도 안 붙여줬다.
혼자 뻘쭘하게 앉아있게 되니 어색해졌다.
혼자서 이 밤에 배로 돌아갈 수도 없고 난감했다.
다들 신나게 여자들과 같이 춤추고 웃고 술 마시고 이야기를 하면서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내가 한 일은 어쩌면 필사적으로 거기에 어울리려고 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실항사의 여자를 뺏는 거였다.
순둥순둥 잘 웃던 실항사 표정이 굳어졌다.
나중에는 신나게 노는 동기 실기사를 부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울상이 되었던 것 같다.
어쩌겠나 걔도 내가 상사인데...
미안하다 실항사야. 나도 살아야지.
실항사가 찍은 그 여자는 계속 나와 실없는 수다를 떠느라 실항사는 그 여자랑 진짜 아무것도 해보지 못했다.
몇명은 그대로 남고 배로 돌아갈 사람은 돌아오고 끝이 났다.
지금 생각하면 뭔가 씁쓸한데 그때는 진짜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재밌게 놀았네 싶었다.
자기 방어였을까?
아무튼 이래저래 진기한 경험이었다.
내가 하선한 이후로 태국 입항이 몇 번 더 이어졌는데 그때는 해변가에 수상 레포츠를 즐기러 나가기도 하고 방콕 관광을 즐겼다고 했다.
역시 맨 처음은 언제나 시행착오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