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투의 스케치북> 존 버거
나도 그처럼
"내 얼굴 좀 그려봐"
왕년에 내가 미술전공했다 하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저 그림 못 그려요"
어른들에게 뭐 그리라 하면
흔히 하는 대답이다
그런데 이 처럼
내가, 딴 사람 얼굴 선뜻 못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 그림 못그린다 하는 이유는
매한가지다
바로
사물을 '똑 닮게 그릴 자신' 이 없다는 것
그래서 주저주저
뭐 하나도 그리지 못한다
하지만 난 안다
사람은 누구나 그림을 그릴 줄 알고
그림 그리길 즐긴다는 걸
석기기대 원시인도 동굴 천정에
2000년대 대학생도 강의실 책상에
즐겨즐겨 그림을 그린다
그림그리기는 본능에 충실한 행위이니까
3살 짜리 아이가 펜을 쥐면
삽시간에 명품백은 도화지가 된다
그리기는 즐겁다
그래서 아이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신나게 그림을 그린다
뭐 닮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떳떳하게 그린다
하지만
학창시절 미술시간에
닮게 못 그려 우울했었던 어른들은
이젠 애들 그리는 뒤에서
......
사진이나 찍는다
그리고는 집에서
몰래 혼자 색칠공부를 한다
어른들의 은밀한 놀이인
<색칠공부 책>
절찬리 판매 중이다
미술 중등교사 2급 자격증 소지자인 나도
사고 싶었다
당시 무려
교보문고, 알라딘, YES24 취미∙실용 분야 판매 1위
요즘 어른들은 이걸 하며
힐링을 받는단다
모름지기 그림은
닮게 그려야 한다는 부담에 어른들은
힐링 색칠공부를 한다
어른들이 쉽사리 그림 그리지 않는다
닮게 그리지 못해 사람 얼굴
쉽게 못그리는 건
그림 전공한 나와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나도 꼬마때부터
연필로 재가며
팔떨어지게 석고데생을 했지만
지금은 뭘 그리다가도
스트레스 받는다
'안 닮아서'
물론 나는 안다
20세기 이후 미술에서 '닮게 그리기'는
미술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현대미술의 거목
피카소도, 세잔도 닮게 그리지 않았고
재현의 전통을 깨는 것이 현대미술의 가치였다
배웠으니, 요렇게 미술사 시간에 떠드는 내가
실상은 만만한 우리집 강아지 그리다가도
누가 볼까 찢어버린다
그런데 그런 내게
희망을 준 이가 나타났으니
그는 바로
미술평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이며
나이 아흔에도
프랑스 알프스 산자락에서
농사와 글쓰기를 병행 하는
존 버거(John Berger)할배
할배는 평소
베네딕투스(벤투) 스피노자의 글을 흠모하고
항상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니며
드로잉을 했다는 그의 그림이 궁금했단다
(스피노자의 스케치북은 아직 행방불명)
그러던 어느 날
이 할배는 선물받은 아름다운 스케치북에
스피노자의 시선으로 글과 그림을 담아 책을 펴낸다
예컨대, 남자의 얼굴을 그리고
오직 자유로운 인간들 만이
서로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 있다
<에티카> 4. 17
와 같이 스피노자의 글을 인용한 뒤 자기 글을 쓴다
또, 자신의 오른손을 그리고
그 밑에 '왼손으로 그렸다'고 써 넣는다
오호 나도
그의 재치에 갑자기 용기가 생긴다
내 안의 눈치보던 환쟁이 영혼이 살아난다
왼손으로 그렸다고!
어른의 '서툼'에 할 말이 생겼다.
그러나 난 언제쯤
궁색한 변명 없이
다시, 아이들처럼 자유롭게 그릴 수 있을까?
시선과 판단의 짐을 벗고
어떤 손으로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