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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자이너 정 Jul 09. 2023

다시 붓을 들었다

지긋지긋하다가도 멀리 돌아서면 생각나는 그것

그림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지금까지 커오면서 가장 사랑했던 일 중에 하나지만 이상하게도 다가가려 하면 할수록 점점 싫어지는 것 역시 그림이었다. 한국에서 학교 다니며 형식적으로 배우는 입시형 그림이 지겨웠지만, 그래도 그릴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겨우 2개월간 준비한 입시 기간 후 덜컥 예중에 합격하고 나서 가장 처음 겪었던 것은 학교 선배들의 비아냥이었다. 합격생 작품 중 몇 작품을 선정해 전시를 하는 공간이었는데, 내 그림 앞에 서 있던 중학교 2, 3학년 언니들 몇 명이 하던 말을 건너 들은 것이다. “와, 이런 애가 합격을 했어? 우리 학교라고 하기 쪽팔리다.” 그리고 잇따라 있었던 합격생 전시회 때 출품한 파스텔 작품은 전시 첫날밤, 누군가 의도적으로 손으로 마구 부비적 거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다. 3, 4년간 입시 준비를 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에 비해 내 실력이 형편없었던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나의 형편없던 그림 솜씨가 그들을 쪽팔리게 할 정도였다니. 그 쪽팔림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이었을까?


그 후 시간이 지나 미술부 선생님들에게 “도대체 제가 왜 합격한 걸까요”라고 물어보니 되려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형식적이지 않고, 그림 속에 스토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입시 준비를 오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1학년을 마치며 매년 열리는 전시회 때 나의 작품은 학교 전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뽑히게 되었고 각종 책자와 광고 팸플릿 등, 학교에서 프린트하는 모든 광고 매체에 프린트되어 퍼져나갔다. 3학년이 아닌 1학년 학생의 작품이 전시 대표 작품으로 뽑힌 것 역시 학교 역사상 최초였다.


몇 년 후, 미국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정말 존경하던 미술부 강사 선생님께서 나를 오피스로 부르셨다. “너, 그림 정말 하고 싶으면, 앞으로 한국에 들어올 생각 하지 마.” 한국에 오지 말라니? 황당한 소리에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 나를 보며 선생님은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춰서 다시 한번 말씀하셨다. “여기 있는 애들은 또 고등학교 입시 준비도 해야 되고, 내가 이런 얘기를 해줄 수가 없어… 그런데 너는 이제 떠나니까 내가 솔직하게 얘기하는 거야. 진짜야. 여기서 입시 준비하면서 그리는 거, 이건 진짜 미술 수업이 아니야.”


“미국에 가면 지금까지 배웠던 거는 다 잊어버려. 그냥 다 던져버리고 다시 처음부터 그려. 네가 하고 싶은 거, 그리고 싶은 거, 표현하고 싶은 거 다 그림에 담아봐. 그렇게 다시 시작해. 그리고 한국은 정말 다시 오지 마.”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에이 행 비행기를 탔다.


미국에 와서는 정말 입시 그림이랑 비슷한 것조차도 그리지 않았다. 처음 엘에이 공항에 내려서 가장 놀랐던 건 사람들이 다 덩치가 산만했던 것이다. 그래서 비만 사회의 대표 주자인 미국에서 생활하는 내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 뚱뚱한 어른들 사이에 비실비실한 여자 아이 한 명이 끼어있는 그림. 환경오염 다큐멘터리를 보고서는 다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임산부의 터져버릴 것 같이 큰 뱃속에서 나오는 공장의 연기들을 그렸고, 아프가니스탄의 전쟁 뉴스를 보고서는 총을 들고 서 있는 군인 앞에 빈 밥그릇을 들고 쪼그려 앉아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아이들을 그렸다. 한국에 벚꽃이 피었다는 뉴스를 보고서는 한국을 추억하며 벚꽃이 만개해 사람인지 나무인지 앞을 분간할 수 없는 길 가를 그렸다.


몇 년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술 전공 학부로는 미국 1위(RISD, 예일대학교와 시카고 대학은 미국 내에서 매년 미대 랭킹 3위를 번갈아 차지한다)인 시카고 미술 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합격했다. 합격 통지서를 받고 기쁜 마음에 4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으로 돌아왔고, 부모님과 장학금 외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 대학 졸업 후 나의 미래 등에 대해 대화하던 중 비싼 학비와 졸업 후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내 상황을 돌이켜 보면 정말 불같은 사춘기였다.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던 심한 우울증도 겪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원하던 학교 진학까지 포기하게 되자 ”정말 왜 살지 “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하루하루를 보냈다. 갑자기 수능을 공부하고 한국에서 대학교를 가라고 했다. 한 번도 안 해본 3년 치 한국 고등학교 내용을 혼자 다 공부하고 수능까지 치라니. 답답한 마음에 오랜 중학교 선생님들을 뵈러 예술학교를 다시 방문했다. 선생님들을 다 만나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다들 한 마음 한 뜻으로 절대 이곳을 떠나라고 하셨다.


그렇게 다시 미국에 돌아와 2년제 대학교를 시작했다. 기본 학과들을 그곳에서 마친 뒤 애리조나 주립 대학교로 편입을 했다. 편입을 하던 첫 해에 운이 좋게 엘에이의 한 갤러리스트 분과 연결이 되어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그동안 그려왔던 그림들을 전시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코엑스에 내 작품을 내보냈고, 2017년도 1월에는 LA Art Show에도 내 작품을 두 개 출품 하게 되었다. 내가 아는 작가들의 작품이 맞은편에 걸려있었고 그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전시한다는 생각에 너무 신이 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내가 별생각 없이 만든 작품 하나를 보고 마음에 든다며 비슷한 작품으로 시리즈를 만들라고 강요받았고, 그렇게 20여 개 정도의 작품을 하는 동안 이게 과연 내가 원했던 작품활동인가 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게 됐다.


그림 그리는 것, 작품 활동, 그림과 관련된 전반적인 모든 것에 싫증이 났다. 돈 때문에 포기하게 된 대학 진학 아니었던가? 내가 지금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결국에는 포기하게 되지 않을까? 내가 원하는 작품도 하지 못하고, 갤러리스트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말에 휘둘리는 게 정말 내가 상상하던 모습인가? 팔린 작품들도 결국 수익의 반은 갤러리에서 가져간다. 그림의 가격도 처음 시작하는 어린 작가는 무조건 싸게 해야 한다며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작품들을 올려두기도 했다. 모든 작가가 그렇지는 않지만,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던 나에게는 작가의 위치란 나의 목소리를 정당하게 낼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안 하겠다는 생각에 애리조나에 이사 온 이후로 모든 활동을 멈추고 학교 생활만 했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또 고비가 찾아왔다. 첫 대학 진학을 포기 한 이후로 돈에 대한 강박이 엄청나게 심해진 것이었다. 집중해서 학교를 다니기만 해도 부족한 상황에 미술 전공으로 학교를 졸업하면 무엇을 하며 먹고살아야 하지를 고민하며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했다. 그림을 열심히 그릴 수록 이 노력들은 결국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불안에 떨었다. 결국 졸업하는 마지막 해에는 심한 공황장애가 오면서 흰색 캔버스 앞에만 서면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뛰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같이 작업을 도와주시던 교수님께서 다행히 내 상황을 이해해 주셨고, 겨우 겨우 졸업 작품들을 완성하고 졸업했다.


그렇게 졸업을 한 후 가장 처음 한 결심은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애잔해져서 괜찮아질 거라고 꼭 안아주고 싶은 지경이다. 중간중간 gap year가 많아서 졸업생들 중에서는 나이도 많은 편이었다. 그림과 담을 쌓고 커다란 박스 여러 개에 모든 미술 재료들을 넣고 옷장 안에 처박아두었다. 그게 정말 마지막인 줄 알았다.


이 일 저 일 기웃거리고, 집도 팔아보고, 로스쿨 준비도 해보고, 공증일도 하고, 알바도 했다. 그러다 아무래도 창의적인 일이 또 그리워서 디자인 쪽으로 알아보게 됐고, 그 길로 UX 디자이너가 되었다. 디자인을 시작한 지 이제 딱 2년이 됐다. 디자인을 시작하면서 전반적으로 생활에 리듬도 생기고, 보람도 느끼며 일을 하게 됐다. 이 일은 그래도 나에게 맞는 길이구나 싶어 오랫동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계속 다른 할 거리를 찾아다녔다. 일을 하면서 다른 부업도 하고 내 사업을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계속 고민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내 사업”을 고민하다 깨달은 것은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었다.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싶은 이유 뒤에는 항상 “그림을 그릴 수 있기 위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었던 것이다. “은퇴하고 나면 그림 그리면서 살아야지,” “돈 문제가 아니었으면 난 평생 그림 그리면서 살았을 거야,” “시골 농가에서 강아지랑 그림 그리면서 살고 싶어” 같은 말을 습관적으로 계속하고 다녔는데, 문득 왜 꼭 은퇴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 라는 의문이 들었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회사 밖에서의 생활에 대한 얘기도 오가기 마련인데, 내 예전 그림들을 보여주고 취미생활에 대해 다들 얘기를 하다 보니, 포기하게 된 창작의 꿈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저 사람들과 다른 게 뭐지? 그들의 눈에는 나도 그저 창작의 꿈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하며 회사 일을 하는 사람인 것이었다. 내가 상상하던 모습은 아니었다. 행복한 삶, 만족한 삶을 떠올렸을 때 “그림 그리고 싶다”는 미련한 마음을, 아무도 말리지 않는 길을 스스로 포기한 삶은, 절대 내가 상상한 삶이 아니었다.


그 후에 지금까지 내 기억을 돌이켜보니 난 항상 두려움 뒤에 숨어서 생활해 왔다. 내 노력이 물거품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모든 걸 걸고 노력했는데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또다시 선택지를 잃고 방황할까 하는 두려움.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고, 내면이 더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 믿고 싶다. 누군가에 의지하지 않고 혼자 헤쳐나갈 수 있는 생활력과, 내 도전을 서포트할 수 있는 직업적 쿠션이 있다. 그리고 가장 큰 차이점 하나는 이게 내가 원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는 것이다.


작품의 퀄리티는 다작에서 나온다고 한다. 70/20/10의 룰이 있는데 내가 하는 모든 일의  70퍼센트는 평균 정도의 수준이고, 20퍼센트는 대재앙, 나머지 10프로는 최고의 결과물이라는 주장이다. 대재앙이란 말은 과장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 70/20/10 룰을 기억하며 작업을 하면 내가 하는 모든 작품의 단 10프로만 자랑할 만한 작품이 될 것이라는 전제 하에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그림을 그리며 지치지 않고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해도 안된다는 마음을 버릴 수 있는 이유이고,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매일 작업실에서 붓을 들 수 있는 원동력이다. 당장 결과물을 원하는 마음도 버릴 것이다. 나의 단 한 가지 목표는 그냥 많이 그리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그림 다 그리는 것. 처음 한국을 떠나 미국에 오면서 신신당부하시던 선생님 말씀처럼 말이다. “다 비워버리고, 네가 하고 싶은 거 그려. 일단 다 그려봐.”


그래서 나는 다시 붓을 들기로 했다. 그냥 다 그려볼 작정이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 진정 살아있는 삶을 누리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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