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방학 때 몰래 마신 막걸리
학창 시절 방학 되면 찾아가는 ‘조치원’ 외갓집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이모가 계시지만, 외할머니 집보다 외갓집이라고 부르는 것이 낯설기만 하다. 외할아버지는 원로 코미디언 임희춘을 닮아서 연예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빼닮으셨다. 외모가 약간 다른 것은 외할아버지 코는 빨간 루돌프 사슴코와 똑같다. 잔소리가 심하신 외할아버지는 가부장적이라서 외할머니와 왜소증으로 몸이 불편한 이모는 항상 거리를 두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래도 나는 외할아버지 심부름하면 잔돈은 내 몫이라서 좋다. 아침에 일어나시면 머리맡에 놓인 숭늉을 드시고 “세면 물 떠와라!” 고함을 치시면 외할머니는 구시렁거리면서 세숫물을 떠다 드린다. 외할아버지는 세면장에서 씻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방에서 세면을 마치시고 일과를 시작한다. 자전거 타고 낚시하러 가시거나 지인들을 만나러 외출하신다. 이모는 집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오전 아니면 방과 후에 학생들 피아노를 지도한다. 이모는 어릴 적 철봉에서 허리를 다치시고 병원 가서 치료받지 못했다. 그것이 평생 한이 된 외할머니는 이모밖에 모르신다. 그 당시는 넉넉한 형편이 아닌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어느 날 외할아버지는 “상진아?”하고 호출하시기에 대답하고 달려갔다. “둑길 아래에 있는 가게 가서 막걸리 받아와라.” 하시면서 주머니에서 쌈짓돈을 주신다. 부엌에 가서 외할머니한테 주전자 달라고 하면서 “할아버지가 막걸리 받아 오래요”라고 말하면, 못마땅하듯 혼잣말로 투덜거리시고 주전자를 내어준다. 주전자 들고 10분 정도 걸어가면 둑길이 나온다. 둑길 밑에 양조장까지 운영하는 구멍가게가 있다. “아줌마, 막걸리 한 되 주세요.”라고 말하며 주전자를 건넨다. 아주머니는 바가지로 항아리에 가득한 막걸리를 한 바가지 떠서 주신다. “막걸리 냄새 죽인다.”라고 마음속으로 말하면서 군침이 돌기 시작한다. 주전자를 들고 가면서 한 모금 마셔본다. 난생처음 맛본 막걸리는 너무 맛있어 감탄한다. 가는 길에 한 모금 더 마신다. “정말 맛있다.” 집에 도착하면 양이 줄어든 막걸리에 물을 몰래 넣는다. 그런 뒤, “할아버지, 다녀왔어요.”라고 말하며 자연스레 주전자를 건넨다. 외할아버지는 밥상을 미리 차려놓고 기다리셨다. 매일 술 드시는 외할아버지는 내가 막걸리를 몇 모금 마셔도 눈치를 못 채셨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학창 시절 몰래 마시는 막걸리 맛은 내 평생 잊히질 않는다. 개학이 다가오자, 외갓집 가족들과 이별해야 하고 다음 방학을 기약했다. 외할아버지가 계시는 막걸리를 맛보기 위해서는 방학에 다시 찾아올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서울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세월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흘러갔다. 학교에 다녀온 뒤, 엄마는 “아빠랑 조치원에 다녀올 테니깐, 내일 누나랑 동생이랑 아침밥 먹고 학교 잘 다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언급하셨다. 외할아버지가 머나먼 하늘나라로 돌아가셨다.
그 후, 여름 방학이 다가와 외할아버지가 안 계신 조치원으로 기차를 타고 갔다. 외할아버지가 사용하시던 방에 외할머니가 누워계셨다. 그날따라 무더운 여름밤, 옥상에 돗자리 깔고 하늘을 바라보며 누웠다. 외할머니가 옥상으로 올라오셨다. “할머니, 저 하늘에 떠 있는 저 별은 왜! 저리 밝아요?”라고 질문하자, 북두칠성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주셨다. “할머니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본 놈들 만나보지 못했어요?”라며 생뚱맞은 질문을 이어갔다. “할아버지가 농사짓는데 우리 논을 일본 놈 ‘나카무라’라는 놈이 돈을 던지고 강제로 뺏어갔어, 할아버지가 안 된다고 하니깐 ‘나카무라’ 놈이 할아버지를 밀어서 넘어뜨렸지, 나쁜 놈…….” 외할머니는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셨다. 잊히지 않는 기억을 되새기며 그때를 묘사하고 계셨다. 그런 외할머니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생존하실 때 투덜거리시던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외할머니는 그렇게 상수를 넘기시면서 할아버지를 따라가셨고 곧이어 왜소증 이모도 외할머니 뒤를 이었다. 그렇게 외갓집은 추억의 그림자만 남기고 저 멀리 사라졌다. 나에게도 이처럼 외갓집에 대한 추억이 살아있으면서 성인이 될 때까지 막걸리 마신 기억을 잠시 잊어버렸다. 물론 외할아버지가 떠난 뒤에는 막걸리를 마시지 못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