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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Jan 30. 2024

정신과약 감약


한 달 동안 나름 의미 있는 일들이 있었다.

처음으로 정신과약을 감약했다.

최소 용량으로 먹던 *라믹탈을 아예 빼버린 것이니 부분적으로는 단약인 것인가?


* 양극성환자의 우울삽화 재방 방지



두 번째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간절하게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이 생각에 너무 깊이 사로 잡혀서 한동안 좌절했고 괴로웠다.

우울장애로 고통받던 인간의 간사한 간절함인지, 잃어버린 시절에 대한 순수한 그리움인 지 모르겠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살아보고 싶었던 적이 없는데 말이다.



30대가 훌쩍 넘으니 조금 알겠다.

나를 방치했던 아버지

나를 감정쓰레기통으로 삼았던 어머니

혼외자식이라 은근히 눈치 줬던 이복형제들

앞에선 가족이었지만 뒤에선 가족이 아니었던 친척들

내가 꼿꼿이 설 곳 없던 상황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제 알 것 같은데 지금 내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과거에 나를 힘들게 했던 것들은 이제 없다.

나는 그것들로부터 도망쳤다.



지금의 내가 과거로 돌아간다는 전제하에, 나는 간절하게 10대 초반으로 돌아가고 싶다.

가족들로부터 눈치 보지 않고 나 스스로를 나의 가족이라 생각할 것이다.

나를 방치했던 아버지에게 더 뻔뻔하게 나의 권리를 요구할 것이다.

길거리에서 나를 모른 체했던 아버지를 붙잡고 아는 체할 것이다.

또 다른 내연녀와 동네를 거닐던 아버지가 보인다면 숨지 않고 내연녀의 머리채를 잡아 아버지에게 던져버릴 것이다.

혼외자식이라 거리 두던 아버지의 자식들 앞에서 당당할 것이다.

아버지 가게에 거리낌 없이 놀러 가고 이것을 내 것처럼 생각할 것이다.

그들의 칼부림에 겁먹지 않고 나 역시 단도를 꺼낼 것이다.



나를 감정쓰레기통으로 삼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정신의학과로 갈 것이다.

엄마는 나를 욕하고 때리겠지만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아침에는 울고 점심에는 웃던 엄마의 감정기복을 보듬어 줄 것이다.

아, 물론 의사 선생님과 함께.

사랑하지만 나만 보면 아버지가 떠오른다는 어머니의 자식들에게 더 이상 사랑을 구걸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삶 속에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사랑받으려고 희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삶에 일방적으로 끼어들려고 하는 이복형제들을 단호히 내칠 것이다.



가족들로부터 받은 소외감과 좌절감을 바깥으로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더 많이 떠들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슬프게 울고 더 기쁘게 웃을 것이다.

혼자 울다가 종국에는 충전케이블로 목을 감지 않을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미미로 돌아가게 되면, 우울장애를 고치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동시에 현실에 좌절했다,

나는 절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도 이전처럼 자살충동에 휩싸이지 않는다.

그저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이 심심하게 느껴질 뿐이다.



죽고 싶은 건 아닌데... 사는 게 재미가 없어요.
물 흐르듯이 흘러가네요.
계약하려고 했던 매장이 마음에 안 들어서 계약을 취소하기도 했고, 예전에 프리랜서로 하던 작업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요.
또 20년 지기 친구가 결혼한다 해서 가방순이를 해주기로 했어요.
이건 팩트들이고 그 안에서 느꼈던 감정이나 감정변화는 그리 크지 않아요.



사는 게 재미가 없는데 정신과약을 감약 할 수 있는 걸 보면, 어쩌면 삶은 그리 슬프거나 화나지 않고 재미없이 흘러가는 것인가?

정상적으로 산다는 건 어쩜 심심하게 살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다는 것 자체가 우울장애약 감약을 할 수 있음을 알리는 신호인 걸까?



밥 안 굶고 누가 봐도 평범한 사람처럼 살려면 우울한 틈이 없기는 하다.

우울해하기에 세상은 너무나 빠르고 바쁘게 지나간다.

우울감은 그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우울하지 않으니 난, 참 심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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