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 우표를 붙이는 흥분을 나누고 싶다
십여 년 전만 해도 비행기를 타면 엽서를 나눠 주는 곳이 있었다. 그 엽서를 받아 들고서 무안해졌던 기억이 있다. 어디엔가 주소를 쓰고 엽서를 띄워 보내야 하는데 사람은 알아도 주소까지 알고 지내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엽서를 만지작거리다가 장난스럽게 우리 집 주소를 써서 보냈던 적이 있다. 여행이 끝난 후 집에 돌아오면 며칠 후에 엽서가 뒤따라 들어와 잊고 있던 여행의 기억을 되살려 주곤 했다. 요즘도 편지나 엽서를 써서 우표를 붙여 굳이 우체통을 찾는 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 일을 그만둔 지 아득히 오래되었다.
신문을 펼치면 세상은 현기증이 날 만큼 빠르게 돌아간다. 세상이 사람을 닦달하니 사람들의 조바심도 광속으로 앞서간다. 과거에 비해 참을성이 줄고 조급증이 심해졌다. 현대인들에게 ‘기다림’은 형벌이다. 그러다 보니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시대착오적인 사람이나 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과거 마땅한 통신수단이 없던 때에, 우리나라에는 일 년에 두 번 서로 소식을 전하는 방법이 있었다. 설날과 단오인데, 한 해가 시작되는 설에는 달력을, 한 여름이 오기 전인 단오에는 부채를 선물하던 풍습이 그것이다. 설과 단오 사이에는 약 6개월의 시간이 놓여 있다. 쌍방의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6개월에 한 번쯤은 서로 안부를 묻고 소통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후 전화가 보급되자 파발을 띄워 달력이나 부채를 보내는 일은 뜸해졌다. 전화기도 통신원을 거쳐야 했던 백색전화 청색전화 시기를 거쳐 지금은 손안에 든 전화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 통신의 발달이라는 것이 통신혁명이라 불릴 만큼 우리 생활에 편리함을 가져온 반면 사람들의 인내심을 고갈시키는 데도 한몫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한다. 생각날 때 언제든 연락할 수 있고 심지어 화상 통화까지 가능한 세상이니 사람들은 어떤 소식을 듣기 위해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다. 모든 것이 즉각적인 세상이다. 자주 만나면서 미운 정 고운 정 쌓아가는 것이 사람 사는 이치이긴 하나 믿어 주고 기다려 주는 것만큼 든든한 관계도 없는데, 아쉽고 쓸쓸하다.
내가 생각날 때마다 돌려 보는 영화가 몇 편 있다. 중학교 때 학교에서 단체 관람한 이후 줄곧 내 마음을 적셔주고 있는 클라크 케이블과 비비안 리 주연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북한 인민군가가 불리는 러시아 혁명 당시의 영화 ‘닥터 지바고’, 그리고 ‘러브 어페어’의 두 버전이다.
이 영화들은 모두 다른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지만 사랑을 테마로 하고 있다. 애슐리의 사랑을 얻기 위해 끝없이 인내하고 자존심을 반납하며 헌신하는 여장부 스칼렛 오하라, 결국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 애슐리의 아내를 돌보며 자신의 사랑을 기다림에 헌납한다. 전쟁 중에 사랑을 나누는 닥터 지바고와 라라는 끝없이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한다. 전쟁 중인 까닭에 그들의 헤어짐은 언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지만 라라는 자신의 지난한 삶 속에서 두 사람이 함께했던 시간을 지켜낸다. 이 두 사랑의 감동은 끈질긴 기다림에서 온다.
시대를 좀 옮겨온 ‘러브 어페어’를 보자. ‘러브 어페어’는 지금까지 세 번 리메이크되었는데 나는 그중 오리지널 버전인 캐리 그랜트와 데보라 커 주연의 ‘An Affair to Remember’와 94년도에 제작된 ‘Love Affair’를 보았다. 생각할 것은 마이크와 테리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 후 테리의 집에서 조우하기까지 오리지널 버전은 6개월의 시간이 흐른데 비해 최근 편은 그 시간적 공간을 3개월로 단축시켜 놓았다는 사실이다. 기다림의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속도가 기준이 된 현대인들에게는 이 3개월도 견딜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문자를 보내 놓고 곧 답이 없으면, 상대방으로부터 “뭐 했어?” “누구랑 있었어?” 등의 추궁을 받기 일쑤다.
집 우편함에 쌓이는 우편물들은 광고지 거나 관공서에서 오는 안내문이 고작이다. 교통과속통지서, 은행 청구서, 카드회사의 연장 요청서 등 내게 처리를 요구하는 것들일 뿐이다. 우리가 신경 쓰고 관계해야 할 사람이 카드회사 직원이나 도로교통과 공무원이 아닌데도 말이다. 한동안 고집스럽게 편지를 써 보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상대방도 바쁜 현대를 사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답은 오지 않았다. 답장이 오는 대신 전화가 걸려오곤 했지만 내 인내심으로는 역부족이었던지 나도 곧 포기하고 말았다.
낮 기온은 벌써 여름인 듯하고 아침 공기는 화씨 70도를 밑도는, 이 어중간한 계절을 환절기라 한다. 이렇게 계절이 바뀔 때에는 교감신경이 맞아떨어지는 사람을 만나 우표를 붙이는 흥분을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