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모두 인간이다
전직 영화 기자의 가끔 오는 영화 리뷰. <왜 장화, 홍련이어야 했을까>에 이어.
뒤늦게 본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 다시 영화 리뷰를 쓰고자 한다.
특히나 많은 이들이 '혈압 오르게 한다'며 열변을 토하고 있는 박보영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리뷰 역시 영화를 좋아하는 1인 나부랭이의 개인적 시선이며, 그 어떤 비판도 환영이라는 점을 미리 말씀드린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스포를 피하고 싶으시다면 당장 뒤로 돌아가시길.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재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대한민국을 집어삼킨 대지진 속에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황궁 아파트 103동.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 103동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주민들은 내보내려 한다. 그 중심엔 영탁이 있다. 불이 난 집에 맨몸으로 뛰어들어 불을 끈 영탁의 희생정신을 높게 사 103동 주민들은 그를 주민대표로 선임하고, 영탁을 중심으로 주민들은 외부인들과 맞서 싸운다.
이후 외부인들의 출입을 철저히 막은 채 자신들만의 규칙을 세워나가기 시작하는 황궁아파트 103동 주민들. 그러나 내부에서도 갈등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들 사이에선 점차 갈등의 싹이 피어나기 시작하는데. 과연 103동 주민들은 대재난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재난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다. 자연재해가 됐든, 인재가 됐든.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재난은 느닷없이 우리들을 찾아온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무너지지 않은 유일한 아파트, 황궁아파트를 통해 질문을 던지고 나름의 답을 내린 작품이다.
엄태화 감독이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통해 내린 결론은 나름 명확하다. 103동 주민들 중 명화(박보영)를 마지막까지 살려둔 걸 보면 말이다. 명화는 쉽게 말해 영화에서 '이상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민성(박서준)과 결혼해 유산의 아픔을 겪은 평범한 인물로, 재난 초기 때부터 외부인들과의 공생을 주장해 왔다. 여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외부인을 돕기도 하고 주민 대표 영탁(이병헌)과 대립하기도 한다.
'이상주의'는 사람들의 저항을 받기 마련이다. 말 그대로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만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현실은 생존이다. 103동 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외부인을 배척하고, 목숨을 걸고 밖으로 나가 먹을 것을 찾기도 한다. 103동 주민 대표 영탁이 그렇다. 영탁에게 생존은 단지 목숨을 부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잃어버린 삶을 지켜내는 것과도 같다. 사기당한 돈을 찾기 위해 우연히 황궁아파트에 왔다가 재난을 만났고, 사람들의 오해 속에 황궁아파트 주민이자 주민 대표까지 된 사람. 그에게 황궁아파트란 자신의 삶을 지켜내는 것과도 같다.
생존은 나뿐만 아니라 내 가족의 생존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민성의 이야기다. 민성은 자기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 명화를 지키기 위해 뭐든지 하는 인물이다. 재난이 일어났을 당시,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끝까지 노력할 만큼 그 안에는 선의를 지니고 있지만 명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짓밟을 줄도 아는, 그 역시 현실주의 인물의 대표라 하겠다.
'현실 = 생존'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명화가 부르짖는 이상은 결국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되어 버릴 뿐이다. 실제로 명화가 몰래 외부인을 도왔다는 것이 밝혀지자 민성-명화 부부는 아파트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고, 민성은 이를 막고자 영탁 앞에 무릎을 꿇으며 충성을 맹세한다. 외부인과 함께 살아가자는 명화의 목소리는 강력한 생존을 의미하는 "아파트는 우리의 것"이란 영탁의 구호 앞에 맥없이 흩어지고 만다.
때문에 관객들은 명화의 선택에 공감하기 어렵다. 이 세상에서 생존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의 생존, 더 나아가 내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명화는 그저 생존의 방해 요소로 느껴질 뿐이다. 후기들에 '고구마 한 트럭을 먹은 듯한 캐릭터', '민폐 덩어리' 등의 평이 이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엄태화 감독이 선택한 건 결국 명화였다. 황궁아파트 내부의 배신자와 그를 필두로 한 외부인들의 공격으로 103동 주민들은 죽음 혹은 추방을 당하게 되고 그 와중에 타인의 도움으로 명화는 목숨을 부지한다. 왜일까.
감독이 단순하게 '이상주의가 옳았어'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명화를 살려둔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이상주의인 명화는 선하고, 현실주의인 영탁은 악하다는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그 저변엔 '이상주의 vs 현실주의' 보다 더 깊은 '인간'이라는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엄태화 감독의 의도가 숨어있는 게 아닐까. 103동 주민들을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어요"라고 말한 명화의 마지막 대사 역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려는 게 아님을 보여준다.
이상주의도, 현실주의도 모두 나 자신이 '인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상대방 역시 '인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명화와 영탁의 차이는 외부인을 무엇으로 지칭하느냐에 따라 나뉜다. 명화에게 외부인은 "그 사람들"이고, 영탁에게 외부인은 "바퀴벌레들"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건, 결국 역지사지가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대방이 사람이어야 '그 상대방과 나의 처지가 바뀐다면'이라는 가정이 성립된다. 내가 만약 황궁아파트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가 만약 떠돌이였다면,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내 아들이, 내 딸이 만약에...
역지사지가 가능해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나도 그 처지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 자체만으로 공존이 가능해지는 셈이다.
극 중 외부인을 내쫓을지 말지에 대한 논의를 하던 장면에서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 "학군이니 뭐니 드림팰리스 사람들이 우리를 얼마나 무시했는데..."
마침 얼마 전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이를 낳은 친구였는데 요즘 유치원에서는 "너희 집 전세니 월세니", "너희 아빠 차는 외제차니 국산차니" 이런 것들로 편을 가른다고 했다.
내가 어렸을 적엔 임대 아파트 사는 애들과 어울리지 말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던 것 같다. 실제로 같은 단지였는데 임대 아파트와 출입구가 완전히 달랐다.
나도 임대 아파트에 살 수도 있고, 우리 집이 월세가 될 수도 있고, 국산차를 타고 다닐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 결단코 상대방을 무시할 수 없다. 만약 처지가 바뀐다면, 당신은 무시받고 살고 싶은가.
그저 서로가 인간임을 의식하고, 인간이기 때문에 존중한다면 황궁 아파트는 어쩌면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됐을지도 모른다. 엄태화 감독은 그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