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녹아있는 초콜릿 상속

2장. 관계를 지켜내는 내면의 힘

by 이향인 조엘
STORY

'평범함'이라는 단어는 어떤 설명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어서 때로는 가족의 복잡한 감정조차 가려버립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단독주택에는 층마다 각자의 삶이 놓여 있습니다.

1층엔 부모님, 2층엔 나, 3층엔 언니

한 지붕 아래 함께 있지만 문을 닫으면 곧 다른 세상이 됩니다. 함께 사는 듯 보이지만 실은 따로 살아가는 ‘현대식 가족’의 모습이죠. 누구 하나 아프거나 다급한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서로를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대화도 필요할 때만 오갑니다.


돌봄이 시작되고, 그 거리감은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물리적 거리는 불과 몇 걸음이지만, 심리적 거리는 몇십 년을 그대로 품고 있으니까요. 그 거리에서 느끼는 막막함과 서먹함이 돌봄의 첫 번째 문턱이었습니다.


지정된 역할 속에서 살아온 우리

우리 세대의 가족 안에는 말하지 않아도 정해진 역할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일하는 사람, 엄마는 돌보는 사람, 자식은 조용히 따라야 하는 사람

그 역할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감정은 종종 뒷전이 됐고, 표현은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버지가 아프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여전히 역할대로 움직였지만, 그 속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는 서로 묻지 않았습니다. ‘딸이니까 당연히 돌봐야지’ 하는 의무감과 함께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아니, 하고 싶기는 한 걸까?


초콜릿 한 조각이 전한 마음

여러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던 날. 무작정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습니다. 잠시 후 대문 앞에서 아버지와 마주쳤습니다. 서로 잠시 머뭇거리다 함께 걷기로 했습니다. 걷는 동안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손에 꼽을 만큼 짧았습니다. 오늘 날씨, 드시는 약, 늘 반복되는 건강 이야기, 그리고 길게 이어진 침묵. 저는 그 시간이 어쩐지 버거워 금세 지쳤습니다. 속도를 내어 뛰었고, 아버지는 느린 걸음으로 혼자 남았습니다.


운동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책상 위엔 작은 초콜릿이 놓여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남겨준 작은 달콤함은 그 어떤 위로보다 컸습니다. 마음이 아리고 미안했습니다. 나는 쉽게 피하면서 마음을 더 열어보려 하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나름의 방식으로 '그 침묵'을 깨고 계셨던 겁니다.


INSIGHT

우리는 아주 평범한 가족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망설였고, 그래서 더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있어도 오랜 시간 유지해 온 거리와 역할은 쉽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 무거운 문을 초콜릿 한 조각과 짧은 산책으로 조금씩 열고 있습니다. 그 사소한 움직임 속에 감정의 유산도 남겨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돌봄을 받게 될 텐데, 그때 나는 어떤 엄마, 어떤 아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내가 받게 될 돌봄도 누군가에게 억지스러운 부담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편안하게 오갈 수 있는 자연스러운 마음이라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그렇게 저는 언젠가 다가올 또 다른 돌봄을 조금씩 연습하고 있습니다.


아주 평범한 나의 이야기

뉴스에 나오는 고독사 이야기나 안락사 논란은 솔직히 저에게 현실감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나고 자라 중산층으로 살아가는 저에게 죽음이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였으니까요. 지극히 효녀도 불효녀도 아닌 '아주 평범한 나'의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책임 질 것인가.

사회복지 제도 및 시설보다 먼저 필요한 건 삶의 마지막을 대하는 마음과 태도입니다.

부모님의 노후, 돌봄, 죽음을 준비하는 감정. 내 죽음을 존엄하게 정리할 수 있는 감정.

하루 아침에 생기지 않습니다.

시간과 배움, 훈련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작은 초콜릿 한조각, 짧은 산책, 스치듯 마주친 눈맞춤으로 관계를 지켜내는 내면의 힘을 한뼘 더 길러 봅니다.



TOOLKIT

가까워지기 위한 감정 돌봄의 연습들

서로의 거리를 솔직히 바라보세요.

가족이라 해도 돌봄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1mm, 1cm, 10cm... 지금 움직일 수 있는 마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관계를 바꾸려 애쓰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 보세요.


작은 행동으로 마음을 전해 보세요

함께 걷기, 좋아하는 간식 건네기, 책상 위에 메모 남기기, 손 잡기. 큰 제스처보다 작은 신호가 오히려 따뜻하게 전해집니다.


돌봄을 ‘결과’보다 ‘관계’로 바라보세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보다 함께하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세요. 돌봄은 완벽하게 '해내야 하는 일'이 아니라 그 '과정을 함께 겪는 일'입니다.


대처 팁

거리감이 느껴질 때 스스로를 탓하지 마세요. '우리는 조금씩 익숙해질 거야.' 마음속으로 다독여보세요. 막막하고 두렵다면 잠시 멈추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면 돼.' 자신에게 말해주세요.


돌봄은 누군가를 완벽하게 책임지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삶에 조금 더 다가가는 연습입니다. 오늘 할 수 있는 만큼만 작은 친절과 이해를 쌓아보세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마인드 가드너]라는 이름으로

돌봄과 죽음을 감정의 언어로 가꾸고 있어요.

가족 돌봄의 여정은 영상으로도 기록합니다.


유튜브 ‘조엘의 정원’ [치매 아버지에게 '유산'받는 법 Ep]에서 함께 해요!

http://www.youtube.com/@joelles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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