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유산은 미움과 한숨부터

1장. 아버지의 치매, 너무 늦게 깨달은 이상 신호들

by 이향인 조엘
STORY

늘 ‘그랬던 아버지’가 어느 순간, 정말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첫사랑을 만나야겠다고 하셨어요. 전화번호를 찾고, 연락할 방법을 궁리하며 우리에게 진지하게 말씀하셨죠. 그 순간 우리는 멍해졌습니다. 엄마는 깊은 한숨을 쉬었고, 아무 말 없이 자리를 피했습니다. 늘 하고 싶은 대로 살아온 아버지였기에 '또 시작이네… 이번엔 또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정말 지친다.' 그런 마음이 담긴 표정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반복되어 온 감정의 고리 안에서 우리는 그 행동을 또 한 번 ‘늘 하던 짓’으로 넘기려 했습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습니다. 정말 이상했습니다.


낯설지만, 익숙한 증상

처음엔 그냥 농담처럼 들렸습니다. 첫사랑, 옛 친구, 고향 이야기들은 늘 그랬듯 아버지의 추억이니까요. 그런데 그 이야기는 점점 집착처럼 반복됐고, 어느 순간 아버지와의 대화를 피하게 됐습니다. 식탁 너머에서 무심히 듣던 말들을 이젠 일부러 방에 들어가거나 고개를 돌리는 방식으로 회피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실지 예상이 됐으니까요.


아무리 설득해도 본인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으셨기에 대화는 피로감만 남겼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아버지는 그 집착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어요. 누군가의 연락처를 찾아 메모하며 전화를 걸어야 한다며 우리를 재촉했습니다.


"혹시... 치매?"


그 단어는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너무 무겁고 낯선 말이었으니까요. 이상하긴 했지만 아버지는 원래 그런 분이셨습니다. 고집스럽고 말이 안 통해도 그게 바로 ‘우리 아빠’였거든요. 그래서 평소보다 예민하거나 비합리적인 말을 해도 그걸 ‘병’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변화였는데 우리는 눈치채지 못했고, 어쩌면 애써 외면했는지도 모릅니다.


가족이라는 프레임

우리 가족에겐 오랜 서사가 있었습니다. 엄마는 참아온 사람, 아버지는 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 이 오래된 프레임 안에서 아버지의 이상한 행동은 또 하나의 ‘사건’으로만 해석됐습니다.


"또 시작이야. 이번엔 왜 저래."


그래서 정말 중요한 신호를 놓쳤습니다. 아버지의 변화는 언제나 어떤 사건처럼 다가왔고, 우리는 반사적으로 반응했습니다. 화내고, 체념하고, 피하고. 그 속에서 이상하다는 감정은 어영부영 흩어졌고, 이상함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더 익숙하게 넘겼습니다.


치매는 멀리 있는 단어니까요. 걷고 말하고 식사도 잘하시는 아버지에게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린 보지 않았습니다. 눈앞의 이상한 행동보다 더 익숙한 가족의 역할과 감정이 그 단어를 밀어냈습니다.


치매는 그렇게 가족이라는 옷을 입고 조용히 다가옵니다. 결국, 누군가 입을 열었습니다.


“뭔가... 이상해. 아무래도...”


그렇게 처음 찾은 보건소 치매안심센터. 이어진 병원 진료와 정밀 검사. 진단명: 전두엽 치매, 중기.


INSIGH

늘 그랬던 아버지는, 이상한 사람이었던 아버지는, 병에 걸려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아버지의 말투와 표정, 반복되는 기억과 감정은 고스란히 스며들었고, 저에게 남겨진 첫 번째 유산은 미움과 원망, 체념과 한숨이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했지만, 우리 가족에겐 이미 늦은 진단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무시해 왔던 수많은 신호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휘감았습니다. 돌봄은 누군가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습니다.


돌봄은 우리가 사랑하던 사람의 낯선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 이미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 낯선 모습은 너무도 익숙한 관계 속에 숨어 있기에 우리는 그 변화를 제때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가족이라는 가까움은 때로 가장 중요한 신호를 가장 늦게 보게 만드니까요.


더 아이러니한 건 그때 저는 사회복지사 과정을 밟고 있었고, 우린 3대가 함께 한 건물에 살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아버지를 보고 있었지만, 그 변화는 일상 속에 스며들었고, 내 안의 ‘전문가적 시선’조차도 가족이라는 렌즈에 가려져 있던 겁니다.


돌봄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우리가 애써 외면해 온 익숙한 낯섦을 이제는 끝까지 바라봐야 할 시간이 온 겁니다.


TOOLKIT

이런 변화가 보인다면 치매를 의심해 보세요.

이런 행동, 익숙해도 주의하세요

갑자기 남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고 말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한다.

과거 이야기를 집착하듯 반복하며 감정이 격해진다.

첫사랑, 옛 친구 등 특정 대상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충동적으로 물건을 사거나 예고 없이 행동이 바뀐다.

감정 기복이 크고, 눈치가 둔해진 느낌이 든다.


가족이 흔히 겪는 감정 착시

“원래 저런 성격이었어.”

“나이 들면 다 그래.”

“부부 싸움이지, 병은 아니야.”


대처 팁

1. 감정이 격해지기 전에 ‘녹음’하세요
말싸움처럼 보였던 대화가 나중엔 진단의 단서가 됩니다. 스마트폰 녹음 앱 켜두세요. 증상이 반복되는지, 어떤 말이 반복되는지 가족끼리도 냉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영상보다 목소리가 현실을 더 명확히 보여줍니다.


2. 병원 데려가기 어렵다면, 먼저 ‘엄마’ 또는 '아빠'를 설득하세요
가족 내 고정된 서사는 방해물이 되기도 해요. “아빠가 또 그래.”가 아니라, “혹시… 뇌 문제일 수도 있어.”라는 프레임으로 바꿔야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3. 혼자 고민하지 말고, 누군가에게 털어놓으세요.
진단보다 무서운 건 가족 사이의 침묵입니다. 가까운 친구, 지인, 치매안심센터 상담사에게라도 말하세요. 내가 이상하게 느낀 걸 말로 정리하는 순간, 가족이 겪고 있는 일이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질병’일 수 있음을 스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상하다'는 감정은 돌봄의 시작입니다. 그 감정이 사라지기 전에 무언가라도 기록하고, 공유하고, 의심하세요. 치매는 우리보다 훨씬 조용하고 빠르게 움직입니다.


[마인드 가드너]라는 이름으로

돌봄과 죽음을 감정의 언어로 가꾸고 있어요.

가족 돌봄의 여정은 영상으로도 기록합니다


유튜브 ‘조엘의 정원’ [치매 아버지에게 '유산'받는 법 Ep]에서 함께 해요!

http://www.youtube.com/@joelles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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