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상속세가 없습니다

프롤로그. 놓치기 쉬운 부모 돌봄의 시작

by 이향인 조엘
STORY

돌봄은 우리가 예상한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자주, 더 쉽게 놓칩니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분이셨습니다. 자기 확신이 강하고 쉽게 생각을 굽히지 않으셨죠. 하지만 가족을 위해 묵묵히 일하셨고, 책임감으로 삶을 버텨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였기에 변화가 시작됐을 때도 우리는 쉽게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아니, 애써 모른 척했는지도 모릅니다.


"나이 들면 고집스러워진데. 감정도 예민해지고."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이상 징후를 일상 속 피곤함으로 덮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치매를 말할 때 흔히 [약속을 잊고, 길을 헤매고, 이름을 틀리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달랐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오히려 또렷하게 떠올리셨고,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첫사랑의 이름을 말하며 연락해 보겠다고 하셨을 때도 우리는 그저 한숨만 내쉬며 웃어넘겼습니다.


"네 엄마, 다른 남자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어느 날, 아버지는 엄마를 의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엄마는 해명하느라 지쳐갔고, 우리는 그저 부부 문제라고 여겼습니다. ‘황혼이혼’, ‘졸혼’ 같은 단어들이 현실로 다가왔고,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날, 우리는 퍼즐을 맞췄습니다

두 분의 이혼 서류를 들고 마음이 뒤엉켰던 그날, 처음으로 ‘전두엽 치매’라는 단어를 마주했습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치매안심센터에 모시고 갔고, 정밀검사 끝에 치매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사회복지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었고, 우리 가족은 3대가 한 건물에서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아버지의 일상을 지켜본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아버지의 변화를 놓쳤습니다. 어쩌면 알아채고도, 받아들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돌봄은 이미 시작돼 있었습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늦게 눈치챈다는 말을 그제야 실감했습니다. 퍼즐이 맞춰졌을 땐 이미 많은 감정의 소모와 상처를 지나온 뒤. 돌봄은 이미 시작됐고, 우리는 그 울타리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치매는 그렇게 다가옵니다. 의학서에 나오는 전형적인 증상의 옷을 입지 않고, 그 사람만의 삶과 성격, 가족의 역사를 덧입은 채로. 그래서 더 알아차리기 어렵고, 더 준비하기 힘듭니다.


"깜빡깜빡하기 시작하면, 그때쯤 준비하지 뭐."


많은 이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그건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일 뿐입니다. 현실의 돌봄은 더 조용하고, 더 복잡하며 더 예기치 않게 시작됩니다. 그래서 돌봄 뿐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감정의 상속마저도 놓치고 맙니다.


INSIGHT

돌봄의 골든타임 안에 해야 할 것들

감정 돌봄은 간병 이전에 실천되어야 할 정서적 연결입니다. 생존을 위한 물리적 돌봄이 아니라, 관계를 회복하고 감정을 남기는 돌봄입니다. '끝'을 위한 준비가 아닌 '존엄한 삶'을 위한 연습입니다.


감정이 닿는 시간이 지나면 관계도 기억도 후회 없이 남기기 어렵습니다. 말이 오가고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을 때가 골든타임입니다. 그 시간 안에 서로의 서운함과 고마움을 꺼내고, 자유의지를 존중하며 안전과 자유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합니다.


무엇을 얼마나 더 많이 해주느냐보다 짧더라도 따뜻하고 편안한 감정을 남기는 것. 지금 남기는 그 감정이 이별 후 유일하게 남는 유산이 됩니다.


돌봄을 받는 나를 위한 준비

그렇다면 나는 어떤 방식으로 늙어가고, 누구의 손을 빌려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까요.


나의 마지막 순간을 누군가의 희생이 아닌 준비된 삶의 일부로 만드는 것. 그것이 나답게 사는 방법 아닐까. 돌봄을 받는 사람도, 돌보는 사람도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 아닐까.


이런 돌봄에 대한 합의가 우리 세대와 부모 세대 사이엔 없습니다. 간병을 끝까지 하지 못하면 불효라고 느끼고, 부모님은 섭섭하고, 자녀는 죄책감을 안게 되죠. 이 악순환의 고리를 덤덤하게 끊어내고 싶었습니다.


누구나 삶의 끝자락에 서면 삶에 대한 집착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커집니다. 그럼에도 [간병은 하지 않고, 감정은 남기겠다]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버지의 삶을 대하는 태도 덕분입니다.


"나는 한평생 참 잘 살았다. 언제 죽어도 후회가 없다. 나는 참 행복하다."


어린아이 같아지는 치매가 진행될수록 삶의 끈을 놓지 않겠다고 떼를 쓰시겠지만, 저는 그 마음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렇듯 누구나 후회 없이 행복하게 살다가 길 원하지만, 의학이나 복지 제도만으로는 어렵죠. 결국 마지막까지 우리를 지탱해 주는 건, 감정을 지키는 힘.


저는 이것을 ‘감정력’이라고 말합니다.


감정력은 돌봄과 죽음을 마주할 때 내 감정을 무너뜨리지 않고, 관계를 포기하지 않도록 버텨주는 내면의 힘입니다. 타고나는 게 아니라 살아가며 조금씩 길러야 하는 마음의 근육이죠. 이 기록은 부모를 돌본 이의 이야기이자 언젠가 돌봄을 받을 나를 위한 준비이며 '감정력'을 길러내는 여정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이 여정 속에서 마주한 질문과 성찰, 그리고 작지만 실질적인 도구들을 함께 담았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이미 그 울타리 안에 들어선 사람이라면,


부디 기억해 주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마인드 가드너]라는 이름으로

돌봄과 죽음을 감정의 언어로 가꾸고 있어요.

가족 돌봄의 여정은 영상으로도 기록합니다.


유튜브 ‘조엘의 정원’ [치매 아버지에게 '유산'받는 법 Ep]에서 함께 해요!

https://youtu.be/5DsxtFYZJZ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