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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 Sep 05. 2023

학교 선생님이 감상하는 <엘리멘탈>

교육 심리와 교육 철학을 곁들여 <엘리멘탈> 감상해 보기

리뷰는 영화 <엘리멘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는 중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한다. 선생님으로 일한다는 것은 물론 한때 교육학을 공부해 본 적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임용고시에 붙어서 더 이상 교육학을 공부할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살아갈 때에 자꾸만 세상만사를 교육학 개념으로 (아주 어설프게) 설명하는 속삭임이 귓가에 들린다. 정작 학교에 다닐 때 더 열심히 공부했던 전공과목 개념이 떠오르는 일은 많지 않은데 유달리 교육학 개념이 삶 속에서 자꾸 연상되는 이유는 아마 교육학이 인간 세상살이의 많은 영역을 포괄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교육 심리, 교육 상담, 교육 철학, 교육 행정, 교육사 등 어지간한 인문학 학문 앞에 '교육'을 붙이면 교육학 영역이 나온다!)


  영화 등 미디어를 시청할 때도 예외가 아니다. <엘리멘탈>을 감상하며 사랑스러운 엠버와 웨이드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 마음이 뭉클해지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삶에서 교육학 개념을 자꾸만 도출하려 하는 나의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어쩌면 이것 나름대로 유의미한 감상일 지도 모른다. 엠버와 웨이드는 우리 학생들만큼 사랑스럽고, 나는 학생들이 이 주인공들처럼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니까 말이다. 그러니 <엘리멘탈>을 보며 교육 심리와 교육 철학이 스멀스멀 연상되었던 지점들을 나누어보고 싶다.




1. 가족의 꿈은 곧 나의 꿈 - 머레이 보웬(Murray Bowen)의 융합(fusion)과 분화(differentation) 개념으로

  엠버의 부모님은 작은 가게를 운영한다. 파이어랜드에서 엘리멘탈 시티로 이주한 직후 형편이 어려울 때부터 정성껏 가꾼 그 가게는 가족의 꿈이자 보물이다. 부모님은 엠버가 준비가 되면 언제든 가게를 물려주겠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부터 엠버는 자신이 응당 그 가게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마치 물이 섭씨 100도가 되면 끓는다던가 0도가 되면 언다는 등의 당연한 자연법칙 마냥 엠버는 그 사실에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다.

  부모님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동일시하는 엠버의 정서는 심리학자 머레이 보웬의 용어를 빌리자면 부모와 자식 간의 정서적 상호의존성이 지나치게 높은 '융합'의 모습을 띤다. 부모와 자식은 필히 '분화', 즉 서로로부터 정서적으로 독립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부모 자식 사이가 아무리 끈끈하다 한들 부모와 자식이 결코 동일인물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보웬의 이론에 따르면 분화를 겪지 못한 인간은 타인의 인정과 평가에 지나치게 영향을 많이 받는 등 고질적인 불안을 호소하게 된다. 자신이 가게 주인이 될 소질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엠버가 '가게는 아빠의 꿈인데...'하고 불안해하며 선뜻 자신의 마음을 따르지 못하는 모습을 보라.



2. 엠버는 '정체감 유실' - 제임스 마샤(James E. Marcia)와 함께 알아보는 엠버의 자아정체감

  엠버는 가게를 잘 운영하는 훌륭한 자영업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노력한다. 가령 손님들 때문에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불을 뿜어서 가게를 태워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엠버가 얼마나 용을 쓰며 노력하던가. (비록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진 않았어도 말이다.) 이토록 자신의 진로를 확고하게 정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엠버는,  아이러니하게도 진로와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발달심리학자인 제임스 마샤 (James E. Marcia)는 자아정체감의 네 가지 상태를 분류했다. 그 네 가지 상태는 '탐색(자신의 정체성을 이것저것 탐구해 보는 것)'과 '전념(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정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요인 중 무엇이 있고 없는지에 따라 구분된다.


  첫 번째 유형은 자아정체성에 대한 탐색도 해본 적 없고 정체성을 정해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 본 적도 없는 정체감 혼미이다. 아직 꿈을 찾지 못한 청소년들이 어느 활동에도 마음을 쏟지 못하고 방황하는 경우가 정체감 혼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유형은 정체감 유실이다. 이 상태의 사람은 정체감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은 없지만 (즉, 탐색은 거치지 않았지만) 뚜렷한 목표와 정체성을 갖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즉, 전념이라는 요소는 갖추고 있는) 상태이다. 아직 정체성을 탐색해 본 적도 없는데 정체성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니, 그 정체성은 본인이 직접 찾은 정체성이 아니라 타인의 의견에 근거한 정체성이라는 말이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부모님이 의사가 좋은 직업이니까 의대에 가면 좋겠다고 하셔서 지금 열심히 공부 중이야."같은 말을 하며 맹목적으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여기에 속하고, 소질과 적성을 탐색해보지 않은 채로 가게 주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의 엠버도 바로 이 경우에 속한다.


  세 번째 유형은 탐색은 있고 전념은 없는 정체감 유예이다. 이름만 들어서는 얼핏 부정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정체감 유예는 정체감 혼미나 정체감 유실과 달리 아주 건강한 상태이다. 아직 진로를 확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확고한 꿈을 위해  노력하는 '전념'은 갖추고 있지 않지만 자신에게 어울리는 진로가 무엇인지 활발하게 '탐색'중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유형은 충분히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한 후 진로를 정해 그것을 이루기 위해 '전념'한 정체감 확립이다.


  이 네 가지 정체감 유형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유리로 자유자재로 모양을 만드는 자신의 재주가 사실 엄청난 재능이라는 사실을 미처 모르던 엠버는 웨이드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가 웨이드의 가족들의 감탄과 칭찬을 통해 재능을 발견한다. 웨이드의 가족들은 유리 공예 기술은 도시를 건설할 때 꼭 필요한 대단한 능력이라고 하며 마침 먼 도시의 유리 회사에서 인턴을 구하고 있으니 도전해 보라고 권유한다. 그 후 지금까지 운명으로만 알았던 가게 물려받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새로 발견한 재능에 대해 생각해 보고, 부모님께 솔직하게 감정을 털어놓고 머나먼 도시로 가 인턴 생활을 시작하는 엠버는 마샤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드디어 '탐색'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엠버가 유리 공예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것에 '전념'하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일단 불건강한 '정체감 유실' 상태에서 건강한 '정체감 유예' 상태에 접어든 엠버에게 박수를 보내주자.


3. 우리는 만남을 통해 성장한다 - 실존주의 교육철학의 관점으로 엠버와 웨이드의 성장 살펴보기

  옛날 사람들은 교육이란 지속적인 노력과 연습에 의해 조금씩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매일매일 논리학을 공부하면 논리력이 매일 조금씩 높아진다는 식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등장한 실존주의 교육철학자들은 교육이 꼭 점진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에 따르면 교육은 종종 갑작스럽게 비연속적으로 일어난다. 가령 무기력한 상태로 지금까지 수년을 보낸 학생이 어느 해에 만난 담임 선생님의 관심 덕분에 갑자기 가치관이 바뀌고 적극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바로 앞 문장에는 실존주의 교육철학의 키워드가 하나 담겨있다. 무엇일까? 정답은 '만남'이다. 실존주의 교육철학은 인격체들이 서로 '만남'을 통해 그전과 다른 새로운 차원의 성장을 이뤄낼 수 있음을 강조한다. 엠버와 웨이드가 서로를 만나 이뤄낸 성장과 변화가 바로 그렇다. 엠버는 불 원소들이 모여 사는 파이어 타운을 떠나본 적이 없고, 웨이드도 물 원소들이 거주하는 소위 부촌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지내온 듯하다. 인종적인 경계를 벗어나지 않고 살아온 그들은 엠버가 구멍을 낸 파이프에 웨이드가 빨려 들어오는 어처구니없고 갑작스러운 만남을 기점으로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결국 그들은 '원소끼리 섞이면 안 돼'라는 엘리멘탈 시티의 불문율을 깨고 이질적인 원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미지의 삶의 방식으로 용감하게 발을 디딘다. 만일 이들이 서로를 만나는 일 없이 '다른 원소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 (20강 완강)' 따위의 강의를 수강했다면 과연 이런 성장을 이룰 수 있었을까? 게다가 엠버는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웨이드의 가족을 '만나는' 과정 속에서 본인의 적성과 소질을 발견하기까지 한다. 이토록 만남은 책이나 강의가 줄 수 없는 값진 교육 경험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엘리멘탈>을 보며 내가 온종일 아이들과 함께하는 학교 교실이 엘리멘탈 시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학생들은 서로 어우러져 지내는 듯 하지만 사실은 성적, 취미, 성별, 성격 등을 기준으로 서로 비슷한 아이들끼리 모여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집단의 경계를 넘어서 유의미하고 지속적인 소통을 이끌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일부러 집단 간의 소통을 활성화하겠답시고 이질적인 모둠을 구성해 모둠 활동을 시키면 친한 친구들과 함께 활동을 할 때에 비해 부쩍 소극적으로 활동에 참여하는 학생들이 다수 보인다. 자신과 다른 특성을 지닌 사회 구성원들(외국인, 장애인 등)에 대한 편견을 은연중에 가지고 있는 학생도 있다. (물론, 선생님 중에도 많다.) 한편 과거의 엠버처럼 자신의 적성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학생들도 있다. 아이들의 꿈과 끼를 찾아준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많은 교육 관련 정책들이 그 목적을 잘 달성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분명 한 명 한 명 보물 같은 재능을 갖고 태어났을 텐데, 그 보물을 찾아주는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함께 손을 잡고 어느 학교나 학원에서도 가르쳐줄 수 없는 소중한 교육을 경험한 엠버와 웨이드가 대견하고 부럽다. 사실 교육이란, 그중에서도 특히 나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회적 포용력 기르기와 나만의 진로 찾기에 관한 교육은 책이나 수업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공들처럼 나와 다른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고'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며 내 꿈을 '탐색'할 때 비로소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선생님의 역할은 학생들이 그런 만남과 탐색을 주체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돕는 것일 테고 말이다. 그런 환경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고 어떤 방식으로 학생들을 도울 수 있을지 아직 다소 막막하게 느껴지지만 뜻을 같이 하는 선생님들과 함께 매일 조금씩 노력하고 싶다. 융합될 수 없을 것 같았던 물 원소와 불 원소가 어우러지고 별 볼 일 없게 느꼈던 유리 만들기 능력이 아름다운 공예품 제작으로 이어지는 교실 풍경이 언젠가는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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