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꽃고무신 신던 소녀가 동생들의 엄마가 되기까지
일러두기
- 할머니가 손녀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을 그대로 유지했다.
- 구술자가 제3자를 칭할 때 기록자를 기준으로 칭한 표현도 그대로 살렸다. 할머니의 생생한 목소리를 그대로 살리되, 생소한 옛 표현이나 방언,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소괄호 ( ) 안에 뜻을 덧붙였다.
- 용어 풀이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인용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나주군 봉황면 덕림리. 내가 둘째여. 내 우게 오빠 한 명 있고, 밑에 여동생 3명에 남동생 한 명 있어.
원래 내 바로 위에 언니가 있었는디 홍역 때매 갓난이 때 죽어부렀어. 옛날에는 홍역으로 많이 죽었지. 그때가 나 낳았을 땐가 안 낳았을 땐가 모르겠네. 두 살 차이였어. 그래갖고 내 호적이 그리 옮겨져부렀어(원래는 1947년 출생이지만, 이보다 2년 일찍 태어난 언니의 출생 날짜로 주민 등록되었다).
근께 내 원래 이름은 김정란인디, 학교 가고서부터는 김정임(언니 이름)으로 불렸지. 집에서는 그대로 부르고. 지금은 친한 친구들한테만 그러고 소개하지. 내가 47년에 태어났다는 것만 알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는 몰라. 근께 그냥 생일도 언니 태어난 날짜로 세지(쇠지).
내가 태어난 동네는 타성(다른 성씨는) 하나도 없이 광산 김 씨들끼리 자자일촌(자작일촌, 한 집안끼리 또는 뜻이 같은 사람끼리 모여 한 마을을 이룸)하고 살았어. 한 열 한 가구 정도 됐을라나?
우리 집은 초가집이어도 컸어. 방 세 개에, 광(세간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물건을 넣어 두는 곳)이 큰 게 있고, 마루도 있고. 잘 살든 못 했어도 그렇게 빈촌이 아니었어.
우리 아버지가 막둥이었던 터라, 우리 엄마는 막내며느리로 바로 저금 나서(시가에서 따로 나와서) 살았지. 옛날에는 아들들이 결혼해도 멀리 안 가고 다 가까이서만 살아. 그래서 큰 집 옆에 그다음 작은 집, 그다음 작은 집, 그리고 막둥이인 우리 아버지 이렇게 네 집이 이러고 다 가까이 살았어.
우리 작은아버지(실제로는 큰아버지이지만, 아버지의 형제 모두를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가 한약방을 하고, 우리 아버지가 환자 오면 옆에서 보조로 제조만 해. 평소엔 농사 일 하면서. 내가 감기 걸리면 아버지가 화롯불 위에다 옹기로 된 약탕기를 올려놓고 부채질해 가면서 약을 대려서 고놈을 푹 짜서 나 먹으라고 줬어. 우리 아버지가 자식들한테 그렇게 자상했지.
근데 또 아버지가 아주 고지식해. 밥상에 젓가락 하나라도 똑바로 놔야 되고, 김치 올라가믄 무 조각 하나라도 반듯반듯 썰어야 돼. 그렇게 안 하면 그날 큰 소리가 나. 큰 방에 출입하는 것마저도 여자들은 앞문으로 들어 댕기들 못하게 했어. 머리도 등까지 계속 길러야 되고. 밤에는 바로 옆집에 사는 큰집 작은집에도 못 다녀오게 해. 그렇고 엄했당께.
우리 엄마는 한문, 한글, 이런 글을 많이 쓰셨어. 옛날에 글씨 많이 쓰는 사람들은 밑에다가 받치는 게 있어. 엄마가 그렇게 글 쓰는 걸 어렸을 때부터 많이 봐왔어. 그때 어렸을 때라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는데 한 대목은 요래.
‘바람 따라 구름은 날아가지만, 이 내 몸은 어찌 못 가는 고.’
지금 생각해도 무슨 뜻이 있는 말 같제? 그런께 학교 댕길 때 동요, 글짓기 같은 거 하면 엄마가 갈쳐준(가르쳐준) 기억이 나.
우리 엄마가 공부도 공부지만, 그렇게 얌전하다는 소리를 들었어. 옛날이어도 우리들을 겁나 이쁘게 키웠어. 학교 가면 선생님들이 “아따 너 이쁜 옷 입었다잉” 그러고. 나는 꺼먼 고무신을 안 신어봤어. 고무신이어도 꽃고무신을 신었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