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꽃고무신 신던 소녀가 동생들의 엄마가 되기까지
우리 엄마가 옛날에 공부를 많이 좀 하셨던가 봐. 그런께 책이 한 짐이나 되게 글을 쓰셨다개. 말로만 어렴풋이 들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일본 공부를 갈치라고 강제를 했었대.
봉황면 소재지가 우리 집에서는 멀어. 봉황이어도 우리가 끄트머리야. 거까지 막 엄마를 데리러 갈라고 해서 엄마가 숨고 그랬다 그드라고. 면 소재지 옆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 책들을 그 집이다 맡겨놨대. 그 뒤로 책을 맡아준 사람이 팔아 먹어부렀는지 일본 사람들이 가져가 부렀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가보니까 한 권도 없더라냐. 그래갖고 그때는 나랑 같이 책을 찾으러 댕겼어.
하룻밤은 제삿날이었는디, 밤중에 자다 깨서 마루를 나가본께 제사상이 정성스레 차려져 있더라고. 배가 출출하던 차에 상 위에 하얀 덩어리가 있길래 떡인 줄만 알았지. 옳다구나 싶어 한입 큼지막하게 베어 물었는디, 오메 그게 비누인 거여.
(눈살을 찡그리며) 지금도 생각하면 그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반란군(당시 여순사건 이후 산으로 들어간 ‘빨치산’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이라 하대? 그 사람들이 비누를 주머니에다가 담고 댕기다가 내리쳤던가봐. 밤에 내려와 가지고 제사 지낸 음식을 싹 가져가부렀제.
그 사람들을 내가 어렴풋이 본 기억은, 군복 입고 모자 쓰고 총 메고 그것만 생각이 나. 아버지 잡으러 와갖고 “어디 갔냐”고 빨리 찾아 내놓으라고 엄마한테 윽박질렀어. 젊으니까 막 그랬다하드마는, 난 그것이 뭔 뜻인지도 모르고.
그래갖고는 계속 잡으러 와서 이제 한 번은 아버지를 이제 잡아가버렸다개. 우리 엄마가 어린 동생을 업고 아버지 찾으러 1시간도 넘게 걸어서 봉황면 소재지를 가니까는 사람들을 한 차 가득 실었더라개. 그러는데 거기 사람들 싣고 있는 사람의 명찰을 보니까 ‘수풀 임 씨’라고 한문으로 딱 써져 있더래.
우리 엄마가 나주 다시에 회진 임 씨라고, 열두 동네가 회진 임 씨인데 그 종갓집의 딸이야. 그래갖고 우리 엄마가 종갓집의 제일 높은 사람 이름을 댔어. 그 사람을 붙들어 잡고, “나는 어떤 사람 집안에 어떤 사람 딸이다. 그러니 좀 내 남편을 여기서 내려달라”고 사정을 했대.
그랬더니 그 사람이 그 말을 듣고는 “얼른 내려서 가라”고 했다개. 그래갖고 산속으로 해서 데꼬 와서 (아빠가) 빠져나왔대. 거기 간 사람들은 다 죽고… 근께 우리 엄마가 아버지를 구했다개.
구술과 기록 사이: 그날의 나주
1930년대 후반, 일제는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황국신민화 정책을 본격화했다. 조선어 사용은 학교와 공공장소에서 금지되었고, 일본어만을 쓰도록 강제되었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말과 이름, 일상의 언어가 하나씩 지워지던 시간이었다.
할머니의 어머니가 쓴 책이 한 짐이나 되었다는 이야기는 그 시대를 더욱 또렷하게 떠올리게 한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글을 쓰던 여성 지식인이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이 어머니를 데리러 오려했다는 대목은 일본어 교육을 강요하려는 시도였거나, 한글로 기록을 남기던 사람을 감시하려는 분위기와 맞닿아 있었을 것이다.
결국 그 소중한 글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한 가정의 상실을 넘어, 우리말과 기록, 생각의 흔적을 지우려 했던 시대의 폭력을 보여준다. 글을 쓰고 남기는 일조차 자유롭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억압의 시대가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폭력이 이어졌다.
할머니가 말한 ‘반란군’은 1948년 여순사건이나 6·25 전쟁 전후 산으로 숨어든 빨치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전남 전역에서는 군·경과 빨치산 사이의 교전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할머니가 어린 시절 전해 들은 이야기였기에, 그때 보았던 ‘군인’이 어느 쪽이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기록은 그 시절의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전한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1948년부터 1951년까지 전남 화순과 나주 일대에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군·경의 진압 작전 과정에서 ‘빨치산 협조 혐의’나 ‘입산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80여 명이 연행되거나 현장에서 사살되었고, 이 가운데 나주 다시면·봉황면·다도면에서만 주민 11명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봉황면과 다도면 사건에 대한 증언은 할머니의 기억과 겹친다.
“밤마다 빨치산들이 마을에 내려와서 밥을 해달라거나 돈을 달라고 했고, 주민들은 해줄 수밖에 없었다.”
1951년에는 나주 봉황면 덕룡산 자락 장성마을에서 빨치산에 의한 학살이 일어났다. 마을 100여 가구 중 20집이 넘는 집이 가족을 잃었다. 2006년 6월 28일자 중앙일보 기사에는 당시 상황을 전하는 증언이 실려 있다.
“밤 9시쯤 갑자기 ‘밤사람’들이 닥쳐서 나오라 하길래 다들 나갔지. 마을사람 스무 명을 골목 안에 몰아넣고 앞을 막아서고 총질을 한겨. ‘다다다다’ 하고 콩 볶듯이 총소리가 요란혔어.”
이 지역에서 ‘밤사람’은 낮에는 산에 숨어 있다가 밤에 내려오던 빨치산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 주민들에게 공포는 한쪽에서만 오지 않았다. 협조하지 않으면 보복을 당했고, 협조하면 또 다른 쪽에서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조사보고서에는 경찰이 “빨치산에게 협조한 사람을 지목하면 살려주겠다”는 식으로 혐의자를 가려냈다는 내용도 나온다. 제대로 된 절차나 확인 없이,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생사가 갈리던 시절이었다.
기사 속 “친형이 50년 7월 보도연맹으로 끌려가 생매장당했다”는 증언은, 할머니의 아버지가 트럭에 실려 갈 뻔했을 때 들었던 “거기 간 사람 다 죽고 왔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 공포는 실제였고, 반복되었으며, 기록 속에서도 확인된다.
총을 든 군인들, 밤마다 울리던 총성, 하루아침에 주검이 되어 돌아온 이웃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전후의 시간 속에서 주민들에게 군·경이든 빨치산이든 결국 모두 두려움의 대상이었을지 모른다. 밥을 해주고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떤 이념 때문이 아니라,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생존의 선택은 다시 목숨을 위협하는 이유가 되었다.
교과서에서 몇 줄로 스쳐 지나가던 사건을, 할머니의 기억과 그 시대를 증언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읽어보니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그것은 더 이상 ‘사건’이 아니라 누군가의 하루였고, 한 가족의 삶이었으며, 마을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평온한 일상과는 너무도 다른 세계가, 불과 몇 세대 전 이 땅에 있었다는 사실이 선뜻 믿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