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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누 Sep 21. 2024

20. 너의 목소리. 01

"재이야, 학교 가야지."


자전거에 재이를 태우자마자 이현은 페달을 힘껏 밟았다. 


"오늘도 지각이야?"


"아니야. 빨리 갈 수 있어." 


"엄마 꼭 잡아."


"응. 엄마, 내일은 조금 일찍 일어나야겠어. 우리."


"그래, 그러자."


대체 나는 왜 이럴까? 오늘도 늦어버렸다. 늦을 게 뻔하다. 


'대체 집에서 뭐 하는 거야? 뭘 하길래 아침마다 못 일어나고.'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양쪽으로 절레절레 흔들며 이현은 바람을 갈라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만해.'


'그만해.'


남자의 목소리였다. 


'대충 할 거면 그만해.'


'아니야. 나는 잘하고 있어.'


여자가 말했다.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어.'


다시 여자가 말했다. 


'하지만 그게 최선이라면, 나랑은 많이 다른 것 같다.'


남자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시무룩하게 쳐다보는 재이를 향해 이현은 코를 찡긋해 보였다.


"미안해, 엄마가."


"괜찮아. 엄마. 나도 오늘 지각하고 싶었으니까."


"사랑해. 재이야."


"나도. 이따 시간 맞춰 와."



재이는 종종걸음으로 커다란 운동장을 걸어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재이가 들어갈 때까지 바라보다 재이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자 이현은 다시 자전거를 타고 온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너는 원래 그래.'


'뭐든 싫증내고 지겨워하고... 남들 다 하는 게 뭐가 힘들다고.'


다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자전거는 끝도 없이 힘을 내어야만 앞으로 갈 수 있다. 그녀도 끝도 없이 힘을 내어 여기까지 왔다. 차를 타면 금방이다. 페달을 밟을 필요도 없다. 나에게도 지름길이 있었을까. 지름길을 갔다면 조금은 더 나았을까. 나는 더 행복해졌을까?


이현은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실 생각이었다. 게스트 하우스 손님들은 이미 아침 일찍 근처 관광지로 떠났고 그들은 저녁 늦게나 들어올 거라고 했다. 새로오는 손님은 해안에게 미리 부탁해 두었다. 해안이 카페에 오면 이현은 다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땀나요, 땀나. 어서 들어와요."


기훈이 바에서 커피 잔을 세팅하고 있었다. 재이를 태워다 주고 오는 시각이 이쯤이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아직 차가 말썽이죠?"


"덕분에 운동하네요. 고물 차를 손보던지 해야 하는데 게을러서요."


"아니 이현 씨가 어디가 게을러요. 아이 키우는 일은 게으른 사람은 못해요."


기훈의 얼굴은 진심이었다. 오늘 아침 내내 들려오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 말을 믿어?


다시 이현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땀은 털어내는 게 아니라 닦는 겁니다. 이걸로 닦아요."


기훈이 손수건을 이현에게 건네주었다. 이현은 고맙다는 말 대신 기훈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그 순간 수호가 카페로 들어왔다. 환하게 웃던 이현의 얼굴이 순간 얼어붙었다. 


리셋! 


이 사람만 보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마치 블랙홀 같다고나 할까. 현실이 정지되고 마치 모든 것이 리셋되는 듯한 느낌.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그런 느낌. 그를 처음 봤을 때도 그랬다. 그 사진 속 그 아이. 그리고 그 옆에 여자. 그리고 이 집. 모든 것이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이현은 알았다. 이건 현실이다. 


카페에서는 존 베리의 영화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You came from the sea라는 음악이었다. 그녀도 존 베리를 좋아했다. 언젠가 기훈에게 그의 음악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기훈은 그 말을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오늘 기훈은 모자를 쓰지 않은 아주 평범해 보이는 차림이었다. 


"기훈 씨는 평범도 어울리는구나."


"아, 내 옷이요? 오늘은 특별히 신경 썼습니다. 평범 콘셉트가 어울려야죠. 진정한 패션은 얼굴이 완성하는 거 아니겠어요?"


기훈은 얼음을 가득 담은 투명한 유리잔에 갓 내린 에스프레소를 부었다. 그리고 다시 커피머신에서 에스프레소 한잔을 더 내려서 같은 잔에 부었다. 


"오늘은 투샷. 이현 씨 얼굴 보니 투샷이 적당!"


"와! 어떻게 알았어요. 기훈 씨는 정말."


둘의 대화를 듣던 수호가 끼어들었다.


"나도 투샷!"


"네가?"


"원샷도 아니고 투샷? 너에게는 너무 진할 거 같은데. 심장이 막 나대고 그러면 어쩌려고 그러냐?"


기훈은 수호를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리듬을 주어 말했다. 


"멀리 가야 돼. 오늘. 졸면 안 되니까."


"수호 씨 어디 가요?"


그제야 이현은 수호에게 첫마디를 건넸다. 


"네, 차 고치러요."


"어머, 수호 씨도 차 고장 났어요?"


"아니요, 제 차 말고 이현 씨 차요."


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랑 수호 씨랑 차를 고치러 같이 간다고? 둘이서? 이 카페는 어떻게 하고? 


"아, 그렇지 그렇지. 그건 우리가 해야지. 그럼. 이현 씨는 우리 단골손님이자 제1호 손님이고, 그리고 또 카페 알바까지 해주고... 게스트 하우스 손님까지 데려와주는 뭐, 우리는 협업관계라고나 할까? 서로 상부상조 아니겠어요?"


이현의 마음을 읽었는지 기훈은 더 너스레를 떨었다. 수호이 기훈의 말에 덧붙였다. 


"오늘은 반나절만 카페 영업해요. 기훈이도 오늘은 손님이 온다고 하고. 해안 씨는 아까 전화했어요. 한주는 엄마랑 한판 해서 못 온다고 하고요. 그러니 오늘이 딱이에요. 재이 오기 전에 맞춰 오려면 지금 가요."


카페 밖으로 나온 이현은 얼떨결에 수호가 운전하는 자전거의 뒷자리에 앉았다. 이현이 타고 온 자전거에 수호가 타고 재이가 타던 안장에 이현이 앉았다. 수호도 자전거가 있었지만 나중에 차를 수리하고 와서 바로 자신을 카페로 데려다주면 자전거 두대를 가지고 갈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게 하자는 거였다. 


수호의 민트색 셔츠가 바람에 한껏 부풀어 이현의 얼굴을 자꾸만 때렸다. 


"재이도 아팠겠어요."

"아.. 이 뒤에 타면요, 이렇게 엉덩이가 아프고 바람 부는 데로 앞사람 티셔츠가 부풀어 오르고, 뭐 많이 불편하네요."


"아니죠. 재이는 엄마에게 의지하잖아요." 


"네?"


"지금 이현 씨는 저에게 의지를 안 하니까. 힘든 거예요."


"의지라고요?"


"그럼요. 꼿꼿이 그렇게 앉아 안장을 잡고 가면 나도 힘들고 이현 씨도 힘들어요. 아니 내가 진짜 힘들어요. 너무 무겁잖아요."


"재이가 탈 때처럼 해야 우리 오늘 차 수리 하고 와서 재이 찾으러 갈 수 있어요."


아... 


이현은 그제야 수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이현은 재이가 하는 데로 수호의 허리를 감싸고 수호의 등에 완전히 기댔다. 그러자 한결 편해졌다. 자전거의 속도도 빨라졌다. 


'누구를 꼬시려고.'


또 그 목소리였다. 


화들짝 놀라 이현은 머리를 가볍게 흔들고 난 후 수호의 허리를 감싼 두 팔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수호에게 의지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수호도 더는 이현에게 말하지 않았다. 의지하지 않는 게 편한 사람도 더러 있다. 아니, 그렇게 살아온 사람도 많이 있다. 


수호는 이현의 고물 차에 탔다. 시동을 걸자 자동차가 부릉부릉 소리를 냈고 이내 속력을 냈다. 겉으로는 별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차 내부는 엉망이었다. 에어컨도 나오지 않았고 난방도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뒷 좌석 문도 열리지 않고 창문은 반쯤 내려가서 올라오지 않았다. 내장은 멀쩡한데 골격이 망가진 전형적인 하드웨어 고장이랄까. 


"많이 불편했겠어요."


"나는 괜찮은데 재이가 그랬죠. 뭐. 여름이 오면 에어컨은 고쳐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거문마을 겨울은 추운데, 어떻게 추위를 났어요? 난방도 안 되는 차, 로즈네도 늘 가면 춥다고 그랬어요."


"아, 작은 꽃집 할머니랑, 아니... 어머니랑 계속 연락하셨던 거예요?"


"편지를 봤어요. 누군가가 보내준 편지. 그 편지에 지난 시간이 몽땅 들어가 있더라고요."


"그거 보셨구나. 그렇구나."


"왜 안 왔었냐고 묻고 싶죠? 지금" 


"뭐 사람마다 사정이 있으니까요."


"엄마가 원했어요. 엄마가 혼자 있기를 원했어요. 그래서 난 그렇게 했어요. 사실..."


수호가 말을 하려다가 결국 하지 않았다. 하지 않기로 결심한 듯 보였다. 이현이 수호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고는 다시 창밖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봄이 지나가고 있었다.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나고 바람은 더워지고 있었다. 유난히 여름을 좋아하는 이현은 봄이 가는 길목을 차로 작은 꽃집 할머니 아들과 운전해 가는 이 모습이 마치 꿈 같이 느껴졌다. 


다시 이현은 고개를 흔들었다. 


"고개를 흔드는 습관, 원래부터 있었어요? 좋을 때는 고개를 흔들던데."


"아... 뭐... 꿈 깨자 이런 거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이현은 약간은 사무적인 말투로 말하는 자신에게 놀라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나무들이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 괜스레 열리지도 않는 창문 버튼에 힘을 주었다 뺐다 했다. 


"자신의 목소리와 남의 목소리를 구분할 줄 아세요?"


"네?"


뜬금없는 수호의 질문에 이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듣기 싫은 목소리가 계속해서 맴돈다면 내 목소리를 찾아봐요. 다른 사람 목소리 속에 묻혀버린 이현 씨 목소리요. 남의 목소리가 아니라 나의 목소리에 집중해 봐요. 그러면 고개를 더 이상 흔들지 않아도 될 거예요."


이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호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호는 라디오를 틀었다. 엉망인 하드웨어뿐인 차는 경적도 잘 울리지 않았지만, 내부 오디오는 아직 쓸만했다. 오디오를 켜자 존 베리의 "Give me a smile"dl 흘러나왔다. 


"내 안에는 이런 음악이 흘러요. 음악. 재이. 그리고 바다..... 이런 것들... 그리고 삶이 그 위를 덮죠. 어떨 때는 삶이 내 목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기도 하니까요."


CD에 남은 음악이 다 끝날 때까지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현은 눈을 감은 채 음악을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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