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누 Sep 30. 2024

23. 프랑스에서 왔어요.

기훈과 해안

"청소나 하죠, 뭐."


해안은 파란색의 얇은 카디건을 하얀색 티 위에 걸치고 나타났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연한 청색의 반바지를 입은 해안이 기훈에게 말했다.


"오후에는 청소할게요. 제가."


"오늘 나는 볼일이 있어서 도와주지 못해요."


"괜찮아요. 창고 정리나, 뭐 해야 할 일만 말해주세요."


"이건 뭐, 쉬라고 해도 일한다고 하니. 일벌레는 일해야죠. 그럼."


"일벌레라뇨, 벌레는 안 좋은 말인 거 몰라요?"


해안이 장난 반 진담 반으로 기훈의 말을 받아쳤다.


검은색 비니, 빨간색, 파란색, 하얀색이 섞인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입은 기훈의 얼굴에 살짝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가 한국말이 서툴러요. 이해해 주세요."


"아니, 기훈 사장님 한국분이 아니에요?"


해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훈에게 물었다.


"한국인이죠. 자랑스럽고 당당한 한국인, 거문마을 출신인 데다가... 그런데 외국에 좀 오래 있었어요."


"어느 나라요?"


"프랑스, 파리요."


해안의 눈이 더 동그래졌다. 거치고 있던 파란색 카디건이 나풀거릴 만큼 폴짝폴짝 뛰어 기훈에게로 바싹 다가왔다. 


"파리 가려고 했었는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요." 













기훈은 얼음을 넣은 잔에 물을 따른 후 에스프레소를 내려서 가벼운 손놀림으로 부었다. 갈색의 액체가 투명한 물속으로 퍼지자 순식간에 진한 갈색의 얼음잔으로 변해버렸다. 기훈은 함께 내렸던 에스프레소 한잔에 거품을 낸 따뜻한 우유를  조금 따라 부었다. 


"자, 나는 마키아토. 해안 씨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기훈이 커피잔을 해안에게 건네며 말했다. 해안과 달리 기훈은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파리에 왜 가려고 했어요? 여행?"


"긴 여행이요? 아마도."


"파리 너무 좋죠. 사람들은 좀 어렵지만. 저는 거기 좀 살았었어요."


기훈은 한국 대학교를 자퇴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요리를 배웠다. 부모님이 워낙 사이가 좋지 않아서 엄마가 우울증이 심했었다. 하지만 마을 한편으로 이사 온 수호와 친해지면서 도망올 곳이 생겼었다. 수호가 공부를 잘해서 서울로 떠나면서 기훈은 근처 대학에 진학했지만 대학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때 작은 꽃집 할머니네 자주 왔었는데 할머니가 추천해 준 곳이 프랑스였다고 했다. 


"요리 공부를 해보라고 했거든요, 수호 어머니가. 나는 그때 요리라고는 라면밖에 끓일 줄 몰랐었는데. 그래도 수호랑 끓인 게 다르다고, 그 한끝의 차이가 있다나. 사실 저는 미식가거든요. 이래 봬도. 수호 그 녀석은 그냥 주는 데로 먹는 잡식가고요."


방황하던 그가 프랑스에 가서 언어를 배우고 요리 학교에 들어가자 적당히 하고 돌아올 줄 알았던 기훈의 아버지도 깜짝 놀랐다고 했다. 


"우리 엄마도 놀랐죠. 엄마가 프랑스에 와서 우울증이 다 나았다고 했어요. 나랑 같이 파리에서 몇 달 사셨거든요. 우리 엄마가 그렇게 즐거워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네요."


"뭐 파리는 그런 곳이에요. 아마 해안 씨도 갔었으면 사랑에 빠졌을 거예요."


"휴, 갈걸 그랬나 봐요."


"조금 있다 가면 되죠. 여기서 잘 쉬고 떠나면 되죠. 인생에서 일 년이 긴 거 같지만 사실 긴 거 아니에요. 떠날 때가 되면 다 떠나게 됩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해안이 기훈에게 말했다.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어요."


"어허, 이런 속셈이 있으셨군요. 나는 바쁜 사람인데..."


"어떻게 잘할 수 있는지만 알려주세요."


"가서 살면 늘어요. 가서 친구를 만들어요. 그런데 여기 있는 동안은 내가 친구가 되어줄게요."


기훈이 머쓱해하며 말했다. 


"뭐, 별 뜻은 없는 거 알죠? 나 딸도 하나 있는 아저씨예요."


"네? 오늘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아네요."


"프랑스에 딸 하나가 있어요, 아주 아주 그림같이 예쁘게 생긴 딸이에요. 그리고 이번 가을에 우리 하나가 여기 올 거예요. 그때까지 뱃살 좀 빼기로 했는데..."


기훈은 아랫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이현 씨에게도 말 안 했어요. 말하면 놀랄 거예요. 재이를 보면서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같이 산다는 게 이렇게 그리울 줄은 몰랐으니까."


"보고 싶으시겠어요."


왜 따로 사냐는 말은 차마 묻지 못했지만 해안은 기훈의 표정을 보고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어른들의 일은 복잡하다. 아니, 산다는 건 참 복잡한 일이다. 


"참, 나만 복잡한 줄 알았는데... 다들 복잡한 거네요. 삶이라는 게"


"그래서 찬란한 거 아닙니까. 삶이. 사는 건 일방통행이 아니라고요. 게다가 직진코스도 아니고. 후진도 있고 돌아도 가고 네비도 고장 나고 사방팔방 교차로에... 그걸 살아내는 우리는 대단한 거예요."


기훈은 언제나 그랬다. 밝고 자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즐기는 싱글일 줄만 알았다. 아픔도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깊은 우울증에, 그림같이 예쁜 딸은 파리에 있다고 했다. 


수호의 엄마를 보면서, 이현의 아들, 재이를 보면서 기훈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방금 전 해안이 프랑스 이야기를 했을 때 마냥 밝기만 하지 않았던 기훈의 표정이 떠올랐다. 


어떤 말에도 여유있는 장난으로 사람들의 기분을 돋아주는 기훈이야 말로 아마도 찬란한 삶을 견뎌왔던 건 아니었을까?

작가의 이전글 22. 좋은 엄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