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불편러 : 매사 예민하고 별것도 아닌 일에도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해서 논쟁을 부추기는 유난스러운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
바야흐로 프로불편러들의 세상이다.
요즘은 교권 추락 문제로 하루 종일 뉴스며 SNS며 떠들썩하다.
언론에서 비춰지는 교권 추락 사건들의 핵심은 문제적 학부모인 경우가 많다.
다양한 사건 속 문제적 학부모들은 자신 혹은 자녀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갖게 된 조금의 불편한 감정도 참지 않는다.
사건의 원인과 결과가 어떠했던 그 과정에서 느낀 불편한 감정에만 집중하며 집요하게, 문제의 해결이나 판결 여부와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교사를 희생양 삼아 옥죄어 왔다.
행위의 정당성이나 교실 내 질서유지와 같은 것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설사 그들, 혹은 그들의 자녀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있을지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것이 초래한 결과가 교사의 죽음임에도 반성하지 않는다.
왜? 나 혹은 내 자녀가 '불편'했으니까.
나의 '불편함'이 다른 사람의 '삶'보다 중요하다.
이게 우리 사회에서, 그것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니….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이러한 일들이 교육 현장에서만 일어날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뉴스를 몇 페이지만 들여다봐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프로불편러들은 누구이며, 어떤 특징이 있을까?
프로불편러의 특징
1. 극단적 자기 중심성
2. 정당화
3. 악의적 추측과 결론의 왜곡
4. 이중잣대
5. 무책임과 회피
한 학부모와 유치원 교사의 통화내용이 화재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전화를 한 학부모는 하루에 30통가량의 문자를 보낼 정도로 평소에도 교사를 힘들게 하는 학부모였다.
통화에서 학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며 따졌다.
교사가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학부모는 교사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카이스트 경영대학원을 나온 사람이라고 드러내며 답변할 틈도 없이 교사를 몰아갔다.
과정에 협박도 있었다.
"당신 어디까지 배웠어요 지금?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나와가지고 MBA까지 그렇게 우리가 그렇게 했는데 카이스트 나온 학부모들이 문제아냐고? …."
"선생님 계속 이렇게 하시면 선생님 위험해요 되게."
"아니 무슨 정도껏 하셔야지. 무슨 권력에 피해받으셨어요?"
통화내용이 공개되고 해당 학부모는 실제 카이스트 졸업생이 아니며,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작가라는 사실 이 밝혀졌다.
사실이 밝혀지고 그의 블로그에 '분노와 한탄'을 담은 글이 하나 올라왔다.
이 글은 이전 통화내용만큼이나 큰 파장을 일으켰다.
글의 요지는 자신이 '피해자'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이런 좋은 사람인데 내 영혼을 담은 책이 테러를 당하고 5분짜리의 녹취록으로 내가 계속 갑질만 일삼는 여자로 보여지고 있다.'
'자꾸 아니라고만 하시길래 답답해서 학력 잠심 운운한 건데 그런 나를 조금도 헤아려 주지 않는다.'
'당시 원 나올 때 하루에 30개가량 다소 차갑게 물어보긴 했지만 부모로서 당연한 거다.'
'이제 속이 시원하세요?', '이랬어야만 했지요?'
'1대 1로 사과를 요청하던지. 인간대 인간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거 아녜요?'
'그 당시 제가 학력 운운하며 언성 높인 게 부끄럽긴 하고 지금 보니 선생님께 죄송하긴 했지만, 지금 제가 처하는 상황자체를 보세요. 역지사지로 생각해도 너무 모욕스럽지 않아요?'
'죄송합니다만 그 교사는 죽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잘못은 당연한 것이고 거짓말을 한 것 역시 정황을 헤아려줘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가해자'인 교사에게 화살을 돌리며, 마지막까지 사과가 아닌 교사 때문에 자신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호소한다.
심지어 교사가 죽지 않았으니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라는 식의 댓글을 남기기도 하고 교사의 실명을 공개해버리기도 했다.
'나의 모든 잘못은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이고, 이 사건의 피해자는 나다.'
대전 학부모의 유명한 명언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내 아들 손이 친구의 뺨에 맞았다.'
내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100이었을 때, 내가 받은 반작용이 1만큼만 있어도, 그 1의 불편함을 1000, 10000으로 표현하는 것, 이게 프로불편러의 극단적 자기 중심성이다.
프로불편러들은 항상 자신은 피해자라고 말한다.
자신들이 불편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라며 타인의 동의를 구하려 한다.
최근 SNS에서는 이런 글이 자주 보인다.
선생님이 SNS에 이런 사진 올리는 거 나만 불편한가요?
지하철에 군인이 앉아 있길래 민원 넣었습니다.
전업주부인데 햇반으로 밥 주는 거 맞나요?
무언가에 불편함을 느꼈을 때, 우선 자신이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를 정당화하고 또 그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소한 뒤 그 행동은 정당했다고 인정받고자 한다.
프로불편러들이 이렇게까지 정당화에 힘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그들 역시 그들이 느끼는 불편함 혹은 그것을 해소하고자 하는 행동에 정당성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SNS에 무슨 사진을 올리던 그들이 맡은 업무와 아무 연관성이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알고, 군인들도 지하철에 앉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 것이다.
하지만 사실관계와 논리를 떠나 그냥, 단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고 싶어 정당화할 근거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든 교사의 SNS 사진이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싶고, 군인들이 본인의 휴가 기간에도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뿐이다.
한 카페 체인점에서 손님과 큰 언쟁이 벌어졌다.
음료가 나왔을 때 직원이 손님을 부르는 방식과 관련하여 손님이 강한 불편함을 표현한 것이다.
"200번 바닐라라떼 나왔습니다~!"
아무리 봐도 문제가 없어 보이는 흔한 카페 아르바이트생의 멘트이건만, 이 손님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역정을 냈다고 한다.
"아니, 내가 죄수도 아니고 번호만 띡 불러요?!"
종업원은 아무런 악의 없이 번호를 불렀을 뿐인데, 손님이 그것을 악의적으로 추측하고 왜곡된 결론에 도달하여 불편함을 느낀 경우이다.
200번과 죄수에는 큰 연관성이 없다.
하지만 악의적으로 추측하자면 위의 손님처럼 어떤 연관성을 찾아낼 수는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악의적인 추측에 근거 없는 내적 확신을 더하게 되면 바로 위의 상황과 같은 왜곡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혼자 갖게 된 그 왜곡된 결론으로 인해 당사자와 상관없이 불편한 감정을 갖게 되고, 이 불편한 감정을 당사자에게 쏟아붓는 것이 바로 프로불편러가 희생양을 만드는 구조이다.
아이의 문제 행동을 교정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매우 광경을 목격했다.
한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7살 아이를 한글 교실에 데려간 학부모가 수업을 따라가지 못 하는 아이를 보며 힘들어하는 모습이 나오더니, 학부모 상담에서는 되려 7살 아이가 한글을 못하는 게 당연하지 왜 학교에 가기 전 배워야 하냐고 상담하는 교사에게 공격적으로 따져 묻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집에 돌아가선 남편에게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 교실에 보내 한글을 익혀야 한다며 다퉜다.
이 학부모가 원하는 건 대체 뭘까?
불편한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런 이중잣대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것 같다.
이것도 불편하고 저것도 불편하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게 불편하다고 말하고, 저기서는 저게 불편하다고 말한다.
내 아이가 아직 한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것도 불편하지만, 내 아이가 한글을 벌써 배워야 하는 것도 불편하다.
학교 가기 전 한글을 배우는 게 좋다고 말하는 교사도 잘못됐고, 아이가 한글 교실에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남편도 잘못됐다.
이게 내적 갈등이기만 하면 다행인데 대부분의 경우 다뤄지지 못한 불편한 감정은 가장 '을'인 사람에게 모두 표출된다.
이렇게 하자 해도, 저렇게 하자 해도 계속해서 불편함을 호소한다.
이 답도 없는 불편한 감정이 풀릴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프로불편러의 이러한 순환고리에 빠져들어 간 을의 결말은 그래서 언제나 참혹하다.
문제적 학부모들이 만들어 낸 교권 추락의 끔찍한 결말은 교사들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이 참혹한 사건들에는 안타깝게도 책임을 질 사람이 없다.
'나는 그저 전화 몇 번 했을 뿐, 주동자는 아니다.'
'우리 아이가 피해자였다.'
'할 얘기 없다.'
'내 신상 어디서 알아냈어!!!'
지역이 다르고 사건이 달라도 이 학부모들의 대응은 어찌나 똑같은지….
그들은 자신들의 불편을 정당하게 표현했을 뿐이라며 회피하지만, 그 표현의 정도와 내용은 듣는 이들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책임을 지울 수도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이다.
어쩌면 그런 부분을 알기에 사회에 이런 프로불편러들이 점점 많아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프로불편러는 누구인가?
내가 내린 결론은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무기로 휘두르는 사람'이다.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면(무조건 참으란 이야기가 아니다), 타인의 삶보다 자신의 감정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그런 감정으로 책임지지 못할 언행을 일삼는다면 그 사람이 바로 불편러이다.
수많은 자기 개발서, 에세이들이 자기 자신에게 조금 더 집중하라고 말한다.
나의 욕구에 귀 기울이고, 내면의 소리를 듣고, 나를 존중히 여기고, 내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보라고 말한다.
좋은 말이고, 필요한 메시지이지만, 이 메시지들을 잘못 적용하면 나밖에 모르는 사람, 내 감정이 무엇보다 우선이 되는 사람이 되고 말 수 있다.
나의 욕구와 나의 감정, 내 마음이 물론 중요하지만, 인간사회는 감정만 가지고 살아가는 사회가 아니다.
불편하다고 말하기 전, 내 감정을 타인에게 쏟아붓기 전에 한 번쯤은 생각해 보자.
내 불편한 감정이, 그 감정을 쏟아내는 행동이 타인을, 혹은 우리 사회를 해하는 행동은 아닌가? 그것을 모두 감수할 만큼 나의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한가?
나에게 집중하라고 말하는 자기 개발서, 에세이와 다른 메시지를 말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잘 다스리고 사회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