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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해영 May 29. 2024

설화에 상상력을 펼쳐 봐
(설인귀 설화)

설인귀에 관해 역사적 사실과 설화 이야기 있다. 설화와 역사를 한 곳에 펼치고 연결을 시도해 보자.


장면 1 한반도에서 태어나 무예를 닦다


파주시 적성지역에 설인귀가 태어나 성장하고 무예를 닦았다는 유래를 담고 있는 지명이 많이 있다. 그는 주월리에서 태어났으며 말을 타고 훈련할 때 지나다녔다는 곳을 마지리라 한다. 무술을 연마한 곳을 무전리라 부르며 설마리는 추운 겨울 말을 타고 눈이 쌓인 감악산 봉으로 달렸다 하여 그렇게 명명됐다. 또 말굽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하여 말굽두리의 지명이 현존한다, 백옥봉 집터에서는 설인귀가 당나라에 갔으나 모국을 침략한 죄를 자책하여 감악산 산신이 되어 나라를 지켜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양주지역에는 설인귀의 초인적인 능력을 나타내는 설화가 있는데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모 밑에서 자랐다. 고모가 소 두 마리를 주면서 밭을 가는 일거리를 줬는데 종일 놀다가 고모의 독촉을 받고 삽시간에 밭을 갈아버렸다 한다. 한 끼 식사량이 돼지 한 마리에 밥 한 말 그리고 술 한 동이였다 한다.   

 

장면 2 설인귀를 흠모하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경극에 연개소문과 설인귀가 주요 인물로 나오는 장면이 있다. 설인귀는 당나라의 태종이 연개소문과 싸울 때 위험에 빠지자 그를 구출하였으며 고구려 조정이 안시성의 지원병으로 보낸 중앙의 정예군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맹장이었다. 그것도 소수의 병력으로 많은 수의 고구려 군대를 패배시켰다. 당 태종이 안시성 싸움에 지고 회군할 때 설인귀를 극찬하였는데 요동 땅을 얻는 것보다 살인귀를 얻음이 더 값지다고 하였다.      


또 고려 왕조는 중국의 오대십국이라는 혼란기에 나라를 건국하여 중국 왕조의 영향이 비교적 적었다현종 시대에 이르러 고려는 중국 북방을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 거란과 전쟁을 하여 당당하게 승리한다이때 송나라는  북경지역의 연운 16주의 땅을 되찾기 위해 거란과 대규모 전쟁을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거란과 형제가 되는 조약을 맺게 되는데 송나라는 거란을 형으로 모시며 매년 막대한 재물을 거란에 바치는 굴욕의 서약을 한다.


 이때는 송나라나 거란의 전성기 시대로 송나라나 거란 모두 황제 뒤에는 여자 황후와 태후가 실권을 휘두르고 있었다이러한 거란의 침략에 고려는 초기에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개경을 포기하는 수모를 당하자 설인귀의 능력에 기대어 국난을 극복하고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낸다.    

       

설인귀 소설을 읽다

조선 후기 중국에서 쓰인 설인귀에 관한 소설이 출간된다. 중국판 설인귀 소설을 기본으로 일부 내용을 추가하여 조선판 소설이 나온 것이다. 설인귀의 군대 투신 과정과 당나라의 태종을 따라 고구려와 싸움에서 큰 전공을 세운다는 설정이다. 여기서 설인귀는 흰 옷과 백마를 애용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설인귀는 한반도 적성에서 출생하였으나 백성계급이라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당나라 군대에 입대하나 본인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흰옷과 백마를 타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장면 3 역사에서 설인귀     


설인귀는 중국 섬서성의 한성에서 태어나 집안이 가난하여 군대에 입대한다. 무예가 뛰어나나 그를 싫어하는 상관들에 의해 전투병이 아닌 취사병으로 업무를 하게 된다.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전쟁에 참여하게 되는데  전투 중 당태종의 목숨까지 위협을 받는 상황에 처 해지자 설인귀의 부대가 뛰어나가  용감하게 싸워 당태종을 구한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는 고구려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안동도호부를 설치하는데 설인귀는 이 기관의 책임자 역할을 한다. 그 후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 막바지에서 수군을 이끌고 신라와 싸우나 패전한 후 당나라로 돌아간다.      


설화에 상상력을 더해 설화와 역사를 연결하여 보자     


한반도 태생인데 왜 당나라 군대에 들어갔을까?


삼국시대 파주 적성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격렬한 대결을 펼쳤던 곳이다. 고대 시대에 강의 역할은 현재 고속도로처럼 물자와 인력의 주요 이동 통로였다. 이 지역은 한반도 중앙에 위치한 한강 수계에 포함되어  한강을 컨트롤하는 나라가 한반도 전체의 패권을 장악하는 요충지 역할을 하였다.  

    

그러하다 보니 적성지역은 군부대가 상주하는 군사와 군인이 우선하는 지역이며 이 지역을 장악하였던 나라도 백제에서 고구려 신라로 바뀌어 어느 한 나라가 줄 곳 지배하는 지역이 아니었다. 그러하다 보니 그곳에 사는 백성들의 처지에서 매일매일의 생활이 긴장되고 군인들의 동태를 살펴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백성들의 생활에 제일 영향력이 있는 직업은 군인이며 특정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 비교적 낮았을 수 있다.   

   

또한 백제의 선박 제조 기술과 운항 실력은 당나라 역사서인 당서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우수하여 한반도에서 배를 이용하여 중국과 왕래하기가 쉬웠다. 따라서 적성지역에 태어나 무술을 연마한 설인귀는 출세를 위해 군인의 길을 가려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백성계급인지라 신분의 제약이 덜하고 재능을 펼칠 수 있는 당나라로 입국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당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그를 왜 우리는 떠 받들었을까?


고대 한반도의 국가는 중국의 간섭에서 자유롭기가 상당히 곤란하였지만 고려는 건국 무렵 중국은 극심한 혼란 시대였다. 그래서 독자적으로 나라를 세웠으며 고려 성립 후에도 송나라의 관리나 지식층이 출세를 위해 고려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중국풍과 고려풍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는 분위기이며 중앙이 지방을 일방적으로 지배하지 않는 서로 공존하는 국가 운영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하다 보니 중국과 중국인에 대해 저항감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한민족이라는 동질감을 갖게 됨은 몽고와의 오랜 전쟁을 겪으면서 자란 것이다. 


따라서 거란의 침략을 받자 준비가 미흡한 고려인과 고려조정은 설인귀를 불러내어 국난 극복의 기대처 또는 수호자 역할을 기대함을 그 당시 사회 분위기로 보면 그렇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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