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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해영 Jun 19. 2024

사회 지도층의 公公 私私와 삶의 질(당태종 설화)

우리는 지도자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언행에 큰 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아마 그들의 일거일동이 보통 사람들의 안녕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에도 그러한데 왕조시대는 그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어서 더욱더 민초의 생활을 좌지우지하였을 것이다. 


옛날 민초는 지도자의 어떤 행위에 호감을 느끼며 어떤 언행에 악감을 품었을까? 그들의 언행을 직접 듣거나 볼 수 있는 기회가 매우 적었겠지만 간접적으로 듣거나 흘러나오는 사건으로 판단을 하였을 것이다.     

 

 지도자 및 그와 친한 인물들이 공과 사를 냉철하게 구분하지 않고 오히려 이익을 끼리끼리 나눠 갖거나 공적인 힘을 사적으로 휘두르는 경우와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민초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자신들과 더 나아가 사회까지 망가뜨리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은 행위의 결과를 자기들이 다 감당하면 좋겠는데 오히려 책임을 백성들이 감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서 우리는 공과 사를 확실히 하는 지도자가 희망한다. 당태종의 경우를 보자. 당테종은 고구려를 침략한 관계로 우리는 좋아할 수 없는 감정이 있는데도 설화에서 절친을 친구로만 대하는 이미지로 등장한다. 중국인이 등장하는 설화의 경우 그 중국인이 역사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기며 사회발전에 큰 공헌을 세운 사실과는 다르게 못된 행위를 하거나 우리 민초에게 형편없게 망가지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경우와 사뭇 다르다.     

     

설화 내용


태종이 천자가 되기 전에 엄자릉과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나중에 누가 출세하던지 서로 도와주기로 맹세하였다, 태종이 황제가 되었으나 엄자룡은 친구 밑에서 벼슬을 못 하겠다며 몰래 사라져 위수가에 숨어서 낚시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당태종은 친구의 초상화를 그려 전국에 배포하면서 꼭 찾으라 하였다. 


그런 노력의 결과 친구를 찾게 되어 궁전으로 데리고 와서 이런저런 언행을 하다 함께 잠을 자는데 엄자릉의 다리가 당 태종 배 위에 올려져 자고 있었다. 태사관이 천문을 보니 자미별에 객성이 침범함을 보게 됨이라(昨夜故人紫微垣同寢)의 말이 유래되었다.          

 

설화 이해하기 


이 설화에 등장하는 엄자릉은 당태종보다 600녀 년 전인 동한을 건국한 유수의 동창이다. 두 사람은 어릴 적 함께 공부한 친구이다. 유수가 황제가 되자 엄자릉(이름은 광)은 친구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가 은거하며 낚시하며 세월을 보낸다. 


그러자 유수는 엄자릉을 황궁으로 불러 두 사람이 만나는데 엄자릉은 황제 친구를 보자 반가워하며 예전 함께 공부할 때의 이름을 불렀다. 이처럼 엄자릉이 예의를 갖추지 않고 황제를 황제로 대하지 않고 친구로 대하자 주변의 신하들이 놀라며 어쩔 줄 몰라했으나 유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신하들을 물리치고 친구와 이야기하다 같이 잠을 잤다.


 이 둘의 잠을 잘 때 엄자릉의 발이 황제 유수의 배 위에 올려져도 아무 일이 없이 잤다고 한다. 두 사람은 사적인 친구로만 관계하였으며 엄자릉은 친구와 헤어진 후 본인의 삶을 살아갔다.     


황제 친구를 사적으로만 대하고 공적으로는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 친구의 우정과 그런 우정을 사적으로만 대하는 이야기를 보기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사례


지도자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이 공과 사를 엄격히 절제하지 않고 끼리기리 해 먹은 사례를 들어본다. 광해군은 선조 임금의 두 번째 서자로 태어났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책임감 없는 아버지 선조를 대신하여 전쟁을 수행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임금과 신하들의 왕위 계승 방해와 명나라의 트집으로 왕위계승이 순조롭지 않자 광해군과 함께 전쟁을 수행했거나 친한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도움으로 어렵게 왕위를 계승한다. 광해군이 왕이 되자 공로자들이 자기들의 공을 과시하며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 못하고 권력을 남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거나 반대파 억압에 열중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공사불명의 행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광해군은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그들은 목숨을 내놓게 된다. 광해군과 그의 추종 그룹의 행위를 개혁하겠다고 정권을 잡은 인조와 공신들은 광해군 때보다 더 심하게 공권력을 사적으로 휘둘러 반대파를 제거하고 자기들끼리 이익을 더 많이 가지려 역쿠데타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일련의 행위 결과 극심한 내부 분열과 외적 방어에 소홀하여 병자호란을 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의 지도자가 항복하는 치욕을 겪게 되며 패배의 책임을 고스란히 백성들이 짊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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