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리뷰
영화를 보고 난 후 안개에 휩싸인 농로를 걷는 느낌이었다. 뭔가가 보이는 것 같고,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엇. 그걸 찾아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누웠을 때, 김상욱 박사의 책 ‘떨림과 울림’이 떠올랐다.
그는 책에서 ‘우주는 떨림이다. 정지한 것들은 모두 떨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동안 공기가 떤다.’ 고 말한다. 진동수에 따라 달라지는 소리. 그렇게 떨림은 과학의 영역이다. 그럼 울림은 뭘까? 그는 ‘울림은 인간의 영역이다. 우리는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떨림에 울림으로 반응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럼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울림은 무엇일까? 영화 속에서 울림은 음악이다. 인간의 종말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소리가 울리는 <소리굴다리>를 찾아 음악적 퍼포먼스를 벌여야 한다는 설정은 그래서 매우 인간적이다. 도입 부분의 기후위기에 대한 설명은 과학적 ‘떨림’이고, 그 위기를 해결하는 방법은 인간적 ‘울림’이라는 상징은 기발하다. 하지만 그 울림이 과연 효과적으로 전달됐을까는 여전히 의문이다.
마치 인터뷰를 하는듯한 인물들의 이야기. 중간중간에 삽입된 자료화면들. 굳이 영어를 사용해야 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내레이션. 주인공인 두 명의 인물들이 굴다리 아래에서 연주를 하는 동안 우리에게 달려오는 컴퓨터 그래픽.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탈춤을 추는 인간들.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미지.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제법 기억에 남는 장면이 많다. 특히, 둘이 죽기 위해 찾아간 소래포구의 허름한 선착장과 바다 위를 떠다니는 약봉지 같은 것들.
그 와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천사의 모습과 배경 화면으로 깔리는 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시다. 영화의 자막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이 장면은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역사의 천사인 앙겔루스 노부스. 독일의 화가 파울 클레가 그린 ‘앙겔루스 노부스’에 대해 발터 벤야민의 그 유명한 말을 빌려 온다.
‘그의 눈은 찢어져 있고, 그의 입은 열려 있으며 그의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는 그러한 모습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는 얼굴을 과거를 향해 돌린다. (중략) 그가 날개를 디딜 수 없을 만큼 강한 폭풍이 천국으로부터 불어온다. 천사 앞에 있는 페허의 더미가 하늘을 치솟을 정도로 쌓여가는 동안, 이 폭풍은 그의 등이 향하고 있는 미래로 그를 끝없이 몰아넣는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폭풍이다.’
천사의 시선이 과거를 바라보는 이유는 고통받고 희생당한 사람을 응시하기 위함이고, 이를 통해 구원이라는 미래로 향한다. 예술의 역할이 울림이라면 그 울림은 과거의 역사에서 가장 위로받아야 할 사람을 위로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굿을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마지막 탈춤을 추는 사람들. 음악과 함께 벌어지는 연희는 그래서 해원의 한마당이다.